신부님의 글/홍성남 신부님의 글

결실 맺는 삶 - 행복

yyddgim 2012. 2. 8. 21:57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주 살벌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다 쳐버리겠다는 섬뜩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두고 신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도대체 열매를 맺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러다가 나름 결론을 내린 것이 OMNIBUS OMNIA.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러한 생각이 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지향으로 수도원 문을 두들겼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교회 안에서 수많은 걸출한 성인들이 배출되었고,

우리 교회의 대표적 이미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삶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삶의 패턴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현대영성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쉽게 지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누군가가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의 목적부터 시작해서 인간사 대부분이 그렇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나서서 “내가 해줄께” 하면 얼씨구나 하고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요구하는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네 바램을 다 들어줄께. 하늘에 별이라도 따다줄께하는 말 한 마디에

눈물, 콧물범벅으로 감동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되고,

심지어는 전혀 다른 상반된 요구, 떼거지까지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상대방이 들어주지 못하면

애정이 식었다는 둥, 관심이 없다는 둥 하면서 들들 볶아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연 상대방은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과로로 죽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더 서러운 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은

죽자마자 바로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난 그 사람처럼 살기는 싫다”는 뒷소리만 남긴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천당거리를 순시하시는데

골목 구석쟁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니, 기쁨으로 가득 차야할 천당에서 어떤 놈이 울고 지랄이야’ 하면서

놀라 달려가 보시니...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 만 듯한 본당신부 하나가 징징 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넌 누구냐?” 멀뚱하게 바라보던 그 신부가 더 서럽게 울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하느님께서 옆에 있던 베드로사도에게

“쟤 누구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사도가 말하기를,

“주님, 바로 어제 ‘교회가 생긴 이래 본당신부가 천당에 들어온 건 네가 처음이구나’ 하면서

기뻐하셨던 그 아이입니다.”

"어, 그래. 내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져서... 근데 왜 울고 있대냐?“

”자기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 성인신부가 되려고 무지 노력했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술에 취해 한밤중에 찾아와도 자다 말고 일어나 맞아주고,

놀러오라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가 놀아주고,

여하간 단체행사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크고 작은 일에 다 나서서 돕느라

휴가는커녕 쉬는 날도 없이 일해서 성인신부라고 칭찬이 자자했답니다.“

”근데 뭐가 모자라서 저렇게 울고 자빠졌냐? 짜증나게.“

”그렇게 살다가 과로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는데

처음 한 달은 신자들이 줄창나게 찾아오더니만, 어느 날 딱 끊어지더랍니다.

새로 온 본당신부가 꽃미남 구준표를 닮은 놈이 와서

신자들이 거기 팔려 안 찾아오는 것인데,

그게 너무나 원통하고 서러워서 울다 복장이 터져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씨잘데기 없이 착한 척하다가 죽은 것이지요.“

 

두 번째는 심리적으로 공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본성의 상당 부분을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거는 기대역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억압하거나 내몰아버림으로서 인격에 공백이 생깁니다.

그렇게 생긴 공백을 역할연기로 메우면서 가공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대와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고,

기쁨은 없이 불만과 짜증 속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기를

“이러한 삶은 허구적 목표를 설정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채찍질하는

비관적인 삶이다”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이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결실을 맺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전에 자기가 먼저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 내가 행복해야, 살맛을 느껴야

 그제사 자기 인생의 보람을 찾고 싶은 생각이 들고

자기 인생을 사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행복을 나누어줄 수 있고,

결실을 맺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삶이 형편없이 불행한데 남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바보천치이지 결실 맺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 잊지 마시고,

내 마음에 행복감이 충만하도록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