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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사도의 탄생 2000주년 특별 성년 ‘바오로 해’ 기념

yyddgim 2010. 10. 27. 12:37

 

성 바오로 사도의 탄생 2000주년 특별 성년 ‘바오로 해’ 기념


성 바오로 사도의 삶과 가르침


김영남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연재의 취지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특별성년 ‘바오로 해’를 선포하신 뜻을 따르기 위해 의정부교구도 여러 가지 노력을 병행하는 가운데, ‘의정부주보’를 통하여 매주 조금씩 바오로 사도의 신앙과 영성을 마음에 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 첫 순서인 이번 주에는 우선 성 바오로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겠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1) 성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첫째, 바오로 사도의 중요성은 신약성경의 27권 문헌 가운데 13편이라는 많은 양이 성 바오로 사도를 저자로 삼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분명해 진다.


둘째, ‘문헌으로 기록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성 바오로가 교우들에게 써 보낸 편지들은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들이다. 예컨대 테살로니카 1서는 51년경에 코린토에서 기록된 것인데 비하여,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마르코 복음서는 70년 직전 또는 70년 직후에야 기록된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교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다만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 성 바오로는 사도로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가운데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론적 작업’(신학)도 해야 했다. 예컨대,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지(그리스도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신앙론), 교회란 무엇인지(교회론),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윤리신학) 등. 이런 이론적 작업의 일부 결과(신학적 고찰과 권고)가 실려 있는 바오로의 편지들은 후일 교회의 교부들이 공의회 등을 통하여 ‘교리’를 제정해 나갈 때 중요한 기준의 역할을 하였다. 


넷째, 성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좁은 팔레스티나의 공간을 벗어나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거쳐 제국의 수도 로마에까지 전파함으로써 장차 교회가 세계적 교회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섯째, 교회일치적 측면에서도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의 성경적 전거는 근본적으로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신자들과 교회일치적 차원에서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오로의 근본적인 정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교황님께서도 ‘바오로 해’를 선포하시면서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노력하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2) 바오로 사도의 출생과 성장 배경


출생 : 바오로 사도가 타르수스(Tarsus)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하지만(사도 21,39),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바오로 사도의 나이와 관련된 자료는 신약성경에서 두 곳뿐이다. 사도 7,58에서는 스테파노가 순교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울을 ‘젊은이’라고 부르고, 필레몬서 9절에서는 바오로가 자신을 ‘늙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젊은이’라는 표현도 ‘늙은이’라는 표현도 다 막연한 것이어서 이를 근거로 정확한 출생연도를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바오로의 탄생시기를 기원후 5~10년경으로 추정한다. 금년에 교회에서 바오로 사도 탄생 2000년을 기념하고 있는 것도 이런 추정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 : 많은 사람들은, 마치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처럼(창세 17,5), 바오로(그리스어로 ‘파울로스’)라는 이름도 본디 ‘사울’(그리스어로 ‘사울로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다마스쿠스 회심 후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이름으로 알고 있으지만, 이는 오해이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오로 서간에는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에만 (주로 “사울아 사울아 왜 내가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문장에[사도 9,4; 22,7; 26,14]) 나오는데, 디아스포라(‘흩어짐’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팔레스티나 밖에 살고 있던 유다인들의 공동체를 일컬음)에서 태어나 자란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이중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바오로가 살았던 시기에 유다인들, 특히 외국에 살던 유다인들은 두 가지 이름(하나는 유다식 이름, 다른 하나는 로마식 또는 그리스식의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바오로도 집안에서는 전형적 유다식 이름인 ‘사울’이라고 불리고, 학교에 가면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파울로스’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바오로가 자신을 ‘벤야민’ 지파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필리 3,5; 로마 11,1), 바오로가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었던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울로스’(‘사울’의 그리스식 발음)라는 이름과 ‘파울로스’라는 이름은 발음이 유사한 면도 있다.


출생장소와 성장의 삼중적 문화배경


바오로는 삼중적(유다적, 그리스적, 로마적) 문화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그는 열심한 정통 유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그리스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운 도시 중의 하나였던 ‘타르수스’라는 대도시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런 삼중적 문화배경은 후일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지중해의 그 여러 도시들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3) 바오로 사도의 유다 문화적 배경


지난 주보에 기본 줄거리만 다루었던 ‘바오로 사도의 삼중적(유다적, 그리스적, 로마적) 문화배경’ 가운데 첫 번째인 ‘유다 문화적 배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바오로 사도의 ‘유다 문화적 배경’은 필리 3,5에 요약되어 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정통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을 강조한다. 탄생 후 여드레 만에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주어야 한다는 규정은 이미 창세 17,12에 들어 있고, 이 규정은 유다교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졌다(참조: “여드레째 되는 날” 루가 1,59; 2,21). 새로 태어난 아기는 할례를 통하여 선택된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바오로는 비록 ‘타르수스’라는 이방인들의 대도시 속에 살면서도 철저하게 유다적 전통 속에 자라났다.


그리고 이런 배경에서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는 방법을 배워 히브리어(실제로는 아람어)를 할 줄 알았던 것 같다(사도 21,40).  사도 22,3에 의하면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라났고, 당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 말씀에 따르자면 바오로 사도는 비교적 어린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갔던 셈이다. 사도 23,16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는 바오로의 조카가 살고 있었다. 바오로의 다른 친척들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바오로 서간 자체에서도 여러 곳에 나타나지만,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동족 유다인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으며 고생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조상대대로 전해 온 신앙을 저버린 자, 동족 이스라엘의 배신자로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이후에도 죽기까지 자신의 동족을 사랑했고,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바오로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비하여, 정작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의 대다수는 복음을 배척하는 사실에 대하여 대단히 마음아파하면서도,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깊은 사랑과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래의 글은 이런 바오로의 심경을 잘 드러내 준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로마 9,2-4)



(4)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 문화(헬레니즘)적 배경


‘바오로 사도의 삼중적(유다적, 그리스적, 로마적) 문화배경’ 가운데 둘째로 ‘헬레니즘(그리스 문화)적 배경’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바오로 사도의 헬레니즘적 배경은 그가 ‘타르수스’(공동번역 ‘다르소’)에서 태어나 자라났다(사도 22,3)는 사실에서 이미 크게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었을 때, 로마인 천인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사도 21,39). 오늘날의 타르수스는 이미 오래 전에 과거의 영화를 전혀 느껴볼 수 없는 초라한 도시가 되어 있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의 ‘타르수스’는 사도행전의 위의 말씀처럼 과연 로마제국에서 유명한 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 반도(오늘날 터키)의 남쪽 지중해 연안의 동쪽 끝 부분에 있는데, 키드누스(Cydnus) 강이 도심을 지나고 있었다. 타르수스에서 북쪽으로 약 50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타우루스 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있었고, 그 험준한 산맥 사이에 있는 협곡(이른바 ‘킬리키아 관문)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협곡을 통해 예로부터 소아시아 반도 동부 내륙지방(예컨대, 카파도키아 또는 갈라티아 지방)과 해안지방 사이의 인적 및 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타르수스는 바로 이런 지리적 배경에서 교류(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창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57년부터 이곳을 킬리키아(Cilicia)라는 속주의 수도로 삼았다. 이 도시는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젖어 있으면서, 신흥세력인 로마의 영향도 크게 받고 있던 곳으로서 무역업이 번창하였고, 학문도 발달하였던 곳이었다. 기원전 41년에 이 도시에서 있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화려한 만남은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다. 기원전 50년에는 로마의 유명한 연설가 키케로(Cicero)가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이곳에 부임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바오로는 그리스어(희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모든 편지는 ‘그리스어’로 쓰였고, 성경 인용을 할 때에도 히브리어 성경보다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있던 성경(칠십인역)을 더 따르고 있다. 여러 예화도 그리스식 도시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경기장, 권투, 마라톤 등). 그리스 사람들의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복음’ 안에 들어 있던 메시지의 보편적 가치를 알아듣고, 그것을 그리스어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었는데, 그의 이런 능력과 그가 가지고 있던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적 배경은 관련성이 크다. 바오로 사도 당대에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서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공용어는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였다. 지중해 지역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언어 소통의 어려움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5) 바오로 사도의 ‘로마문화적’ 배경과 삼중적 문화배경을 가진 바오로가 선택된 의미


이번 주에는 바오로 사도의 ‘로마 문화적 배경’에 관하여 살펴본 다음, 삼중적(유다적-헬레니즘적-로마적) 문화배경을 가지고 있던 바오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의미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겠다.


바오로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다(사도 22,28). 바오로의 가문이 어떻게 하여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전투를 벌이는 로마 장군에게 큰 병력이나 물자를 지원하거나, 전장에서 크게 공훈을 세우거나, 로마인의 집에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경우도 있고, 사도행전 22장에서 바오로를 신문하던 천인대장의 경우처럼 “많은 돈을 들여” 사는 경우도 있었다(사도 22,28).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바오로 사도가 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로마 시민권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일종의 안전 통행증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는 때때로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였다. 예컨대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시에서 부당하게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행정관들이 그가 로마시민권자임을 알고 사람을 시켜 석방하려고 하자,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공공연히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슬그머니 내보내겠다는 말입니까?”(사도 16,37) 라고 항의하며 필리피 시의 행정관들이 와서 공식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옥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위에서 일부 언급된 사도 22,21-29도 참조. 바오로 사도가 후일 로마에 가게 된 것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후 카이사리아 감옥에 약 2년 정도 갇혀 있다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이었다(사도 25,6-12). 바오로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났다는 점은, 그가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3회에 걸쳐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삼중적 문화배경을 가지고 있던 바오로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로마 1,1 참조). 아니, 신앙적 관점에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느님께서 바오로를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기 전에 그렇게 오묘하게 준비해 주셨던 것이다. 바오로가 지니고 있었던 이런 다양한 문화배경은, 바오로가 여러 민족들에게 다양하게 다가가, 특정 민족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상태와 상관없이,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인 복음”(로마 1,16)을 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에게 힘차게 선포한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6.28).

 

(6)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의 결과인 ‘회심’과 ‘부르심


이번 주부터는 몇 번에 걸쳐 바오로 사도의 일생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던 그의 ‘다마스쿠스 회심체험’을 다루겠다. 이번 주에는 바오로의 회심체험의 전체적 의미를 다루고, 다음 주부터는, ‘바오로 사도가 직접 말하는 회심체험’(갈라 1,15-16; 1코린 9,1; 15,8; 필리 3,4-11)과 ‘루카가 전해주는 바오로의 회심체험’(사도행전 9장을 중심으로)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다루겠다.



그리스도인들, 곧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믿는 이들에 대한 박해의 동기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는 체험을 하기 전에 바오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을 열렬히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공적으로 중죄인으로 단죄하였던 사람,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고 만 나자렛 사람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의 역사 안에서 간절히 기다려왔던 그리스도(=메시아, 하느님이 보내주시기로 약속한 최종적 구원자)라고 선포하고 다니는 것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철저한 바리사이였던 바오로에겐, 그런 예수를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것은 거룩하신 (야훼) 주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토라(율법)을 모독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일어나 회심체험 -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의 결과인 ‘회심’과 ‘부르심’


그러나 이런 확신을 갖고 있던 바오로의 삶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으로 뒤집어졌다. 다마스쿠스 체험 이후 그의 인생 방향은 180도 바뀌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며 박해를 무릅쓰고 만방에 “그분을 복음으로 전하는”(갈라 1,16 참조) ‘사도’가 된 것이다. 바오로의 회심 체험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글들(특히 갈라 1,15-16; 필리 3,4-11)은 한결같이 그의 ‘회심’이라는 변화는 바오로 자신이 기울여 온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의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갈라 1,13-14가 분명히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이 없었더라면, 바오로는 교회를 박멸하려고 했던 삶을 계속 살았을 것이다. 그것도 “하느님을 위하고”, “토라[율법서]를 위하여”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를 하느님께서는 목덜미를 잡아채듯이 또는 어깨를 휘어 감듯이 ‘사로잡으셨던 것이다’(필리 3,12 참조).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저항하거나 피할 수 없을 만큼 압도하는 강한 힘으로 느낀 바오로의 이 체험은(1코린 9,16과 2코린 5,14도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의 체험(아모 7,14-17; 예레 20,9)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바오로 사도의 ‘은혜로운’ 회심 체험은 그의 사도적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서, 인간의 행위에 앞서 선사된 하느님의 은총을 철저히 강조하는 신학을 낳게 했다. 과연 다마스쿠스 체험은 바오로 사도의 영성과 신학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7) 갈라 1,15-16에 의한 다마스쿠스 회심 체험 - 하느님의 계시이자 부르심의 사건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 이 구절에 의하면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바오로에게 계시하신 사건이며, 바오로에게 그를 만민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라고 부르신 사건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바오로가 찾아 나서서 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로운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바오로는 바로 앞 구절인 갈라 1,13-14에서 교회를 “박해하며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 박해자의 길을 끝까지 갔을 것이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이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바오로를 부르신 이 사건은 하느님 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던 ‘부르심’이었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전에는 자신을 전혀 생각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부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첫 순간부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준비해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예레 1,5; 이사 49,1 참조). 하느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의 준비를 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바오로가 이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는 그가 자신의 ‘소명’과 ‘은총’을 연결시키고 있는 다른 구절들을 조금만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특히 1코린 15,10 참조).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준비해 주셨음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당신 아드님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바오로는 여기서 종말론적 용어인 “계시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갈라 4,4; 참조. 마르 1,15)가 되면 하시기로 되어 있던 것을 자신에게 몸소 ‘열어 보여 주셨다’고 이해하였음을 보여준다. “내 안에 계시하셨습니다.”라는 문장에서 “내 안에”(그리스 원문 en emoi)라는 표현도 이 ‘계시 체험’이 그의 삶 전체에 각인(刻印)이 되다시피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 바오로를 부르신 목적


이 문장에서 ‘전하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본디 ‘복음을 선포하다’(복음으로 선포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바오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의식하고 있다. 선교의 사명을 지닌 우리 모두가 ‘복음’으로 전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이러 저러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이 ‘그분’을 진정으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모든 선교활동의 목표인 것이다.



(8) 1코린 9,1; 15,8-10에 의한 회심 체험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은총의 사건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1코린 9,1);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8). 이 두 구절에 의하면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로 “만나 뵙게 된 사건”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바오로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사건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된 1코린 9,1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맥락에 나온다.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라는 말 바로 다음에 나오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사도’의 자격은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그분의 제자가 되었던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자신에게 ‘사도’로서의 결격 사유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의 나자렛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사도직을 당당히 주장하면서도 바오로는 자신이 본디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던 사람이었고, 사도로서의 자신의 삶 전체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의 덕분이었다고 분명히 고백한다. 이에 대하여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헌인 1코린 15,1-11의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가 가장 분명히 말한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직접 체험한 여러 증인들을 열거하면서, 맨 마지막에 자신을 세우며 말한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1코린 15,8-9). 여기서 바오로는 자신을 ‘칠삭둥이’라는 비유한 다음 자신이 교회를 박해한 사실을 뼈아프게 다시 고백한다(갈라 1,13; 필리 3,6도 참조)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이 구절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짤막한 찬미가라고 불릴 만하다. ‘은총’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만 3번이나 나오고 그 내용도 매우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아무런 효과도 없이 공허하게 남아있지 않고 바오로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만큼(필리 3,8; 2코린 5,17 참조) 효과를 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오로가 하느님의 은총을 이렇게 강조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 바오로로 하여금 더 이상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게 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음 말씀에서 드러난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바오로의 그 풍성한 사도적 활동의 원동력이었다.



(9) 필리 3,4-11에 의한 바오로 사도의 다마스쿠스 회심 체험 1


“그리스도 예수님께 붙잡혀”(필리 3,12) 가치관이 온통 뒤바뀐 사건


필리 3,4-11은 다마스쿠스 체험이 바오로에게 단순한 신념의 변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가치관 전체를 뒤바꾸어 놓고, 그 가치관에 따라 여생을 다 바쳐 살도록 했던 결정적 ‘전환’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처형되어 비참하게 죽어 없어진 줄로 여겼던 그 예수를 부활하여 살아계신 “나의 주님”이며 “그리스도”(메시아)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그런 분을 알고 산다는 것, 곧 그분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필리 3,4-6)


필리 3,4-6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분에게 회심하기 전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 유대적 혈통과 관련된 점을 열거한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노력에 근거한 것들을 열거한다.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들 가운데 다음 한 문장에 관하여 묵상해 보자.



“열정에 따라서는 교회를 박해하였으며”(필리 3,6)


불이 없는 인류의 문명은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불은 참으로 쓸모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사용되면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갈 만큼 무서운 것으로 돌변한다. 열정(그리스말로 ‘젤로스’)도 불과 같아서 좋게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다. ‘하느님께 대한 열정’도 마찬가지이다. 바오로 사도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께 대한 열정’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잘못 사용될 때에는, 성서에서도 보듯이 폭력을 동반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데 ‘열정’이 잘못 사용되는지 잘 사용되는지 판별하게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 전반을 통해서 하느님의 가장 큰 뜻(계명)으로 계시된 ‘사랑’과 ‘자애’일 것이다. 사랑과 자애를 무시한 ‘하느님께 대한 열정’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 대한 열정’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깊게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열정’ 또는 ‘율법에 대한 열정’에서 교회를 박멸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 그러한 열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하느님께 대한 열정’마저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1고린 13장)을 깨달았다. 폭력을 동반하는 열정은,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도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길’도 아니다. 그분은 자기보다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처럼 사시지 않고, 주인의 말이라면 죽는지 알면서도 순종하며,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린 양’처럼 사셨다.



(10) 필리 3,4-11에 의한 바오로 사도의 다마스쿠스 회심 체험 2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안다는 최고가치’(필리 3,8)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과거에 그토록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을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바오로는 이것들을 8절 끝에서는 아예 ‘쓰레기’(하잘 것 없는 것들)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과거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 전체가 그 자체로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앎’이라는 최고의 가치에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가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겠다. 산봉우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거기서 바라보는 골짜기의 바닥은 더 낮아 보이는 법이다. 예컨대 오색 약수터와 비교해 한계령도 높은 곳이긴 하지만, 대청봉이라는 최고봉의 높이에서 보면 한계령도 오색 약수터와 별 차이가 없이 아주 낮은 곳에 있다. 이와 비슷하게,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는 ‘깨달음의 높이’에서 자신이 걸어온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바오로에게는 과거에 자신이 ‘높다’고 우쭐대며 살았던 모든 것들이 다 ‘하잘 것 없는 것들’로 보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바오로 사도와 비슷한 체험을 하신 분들이 적지 않게 있다. 과거에 나름대로 권력도 부귀도 영화도 누렸던 적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어느 한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바오로 사도처럼 여생을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앎=믿음 희망 사랑을 포괄하는 친교의 삶) 속에서 자신을 봉헌하며 산(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랑의 주 예수님을 알고 난 후, 과거에 세상기준에서 볼 때 ‘자랑거리로 삼고 살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여생을 겸손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살았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신앙의 증인들이다.



진주 상인의 비유(마태 13,45-46)와 사도 바오로


필리 3장에 묘사된 바오로의 모습은 마태 13,45-46에 나오는 ‘진주 상인의 비유’에 나오는 상인과 같다. 그 상인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하여 그것을 샀던 것처럼, 바오로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8절 끝) 자신의 온 삶을 다 쏟아 붓듯이 살아갔다. 비유에 나오는 진주 상인에게는 ‘그 값진 진주’를 발견했으면서도 가지고 있던 ‘옛 것’을 모두 처분해서라도 그것을 사지 않는 것 자체가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비슷하게 바오로에게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최고의 가치로 깨달았으면서도, ‘옛 것’에 매달려 있음으로써 그분을 찾지 않는 것은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11) ‘루카가 전해주는 바오로의 회심 사건’(사도행전 9장; 22장; 26장)


루카는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사건을 묘사하였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의 회심에 관하여 세 번(사도 9장; 22장; 26장)이나 나온다.



1.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도 9,6)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바오로가 묻자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관한 세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생략되거나 첨가되는 부분 등 차이점이 있지만, 방금 전의 두 문장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이는 이 두 문장이 그만큼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야기 가운데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바오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한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라는 예수님의 대답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예수님 자신이 동일시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1코린 12장 참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된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일치점을 갖고 있다. 사도 9,10(22,10)이하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회심한’ 바오로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교회로 보내셨다. 말하자면 바오로는 다른 신자들과 아무 상관없이 지내는 개인주의적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들어가는 회심을 한 것이다.



2. 다마스쿠스 체험의 충격 - ‘땅에 넘어짐’과 ‘소경됨’의 의미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 9,8-9)


사도행전에 나오는 위의 구절은 매우 인상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바오로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갔는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을 내세우고 좌충우돌 뛰어 다니던 그는 어디 갔는가? 지금까지 바오로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남들의 삶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몸 하나도 추스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소경이 되었다.”  그동안 하느님께 대하여도 토라에 대하여도 잘 안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일순간에 다 “캄캄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다 모르는 것이 되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참회의 아픔을 겪으며 주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바오로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이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가 본 세상은 분명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 뵌 눈으로 본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바오로가 한 다음 말은 참으로 의미 깊게 다가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12) 회심한 후 바오로의 아라비아와 다마스쿠스 체류


1. 아라비아 체류


갈라 1,17-18에 의하면 바오로는 (사도행전 9장의 기록과는 좀 달리) 회심한 다음 우선 아라비아로 떠났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으며, (둘째 다마스쿠스 방문을 포함하여) 삼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여기 갈라 1,17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는 학자들에 의하면 페트라를 중심 도시로 삼고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 아라비아’이었을 것이다. 이 왕국의 임금 아레타스 4세(기원전 9년부터 기원후 40년까지 재위)에 관해서는 2코린 11,32에도 언급되어 있다. 바오로가 아라비아에 가서 정확히 얼마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갈라 1,17-18의 맥락에서 바오로는 회심 사건 후 자신이 즉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오로는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 도시 출신의 바오로가 회심하자마자 황량한 아라비아로 간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요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일종의 ‘피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있었던 ‘회심’의 충격을 내적으로 소화해 내며 기도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회심’의 충격은 그와 함께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던 동료들에게도 크게 미쳤을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신자로 여겼을 것이고, 다른 한편 그리스도 신자들도 얼마 전까지 자신들을 박해하던 바오로를 선뜻 ‘형제’로 맞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내외적 충격과 긴장 속에서 바오로는 아라비아로 갔던 것 같다.



2. 다마스쿠스 체류


앞에서 말한 갈라 1,17-18에 의하면 바오로는 회심 후 삼년 가까이 주로 다마스쿠스 지역에서 머물렀다. 이렇게 보면 다마스쿠스는 바오로의 회심 장소였을 뿐 아니라, 바오로가 자신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와 머물며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전승을 배우며 그것을 내면화하는 시간을 가졌던 소중한 곳이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체류 기간에는 바오로가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민족 사람들 가운데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것 같다. 이 점을 사도행전(9,20-25)은 매우 분명히 전하고 있다. 바오로도 2코린 11,32-33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다마스쿠스 선교활동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2코린 11,32-33에서 바오로는 아레타스 임금의 총독이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을 체포하려고 지키고 있어서, 사람들이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 난 창으로 내려주어서 피신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체포명령이 떨어질 만큼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이 유다인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다마스쿠스는 비록 후일 전개되는 바오로의 선교 여정 과정 중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주 그리스도와의 첫 만남’을 상기시키는 곳이라는 점에서 바오로에게 늘 중요한 곳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13) 회심한 후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갈라 1,18-19; 사도 9,26-30)


1. 갈라 1,18-19 :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케파 및 야고보와의 만남


갈라 1,18-19에 의하면 바오로는 회심 후 약 삼년 정도 아라비아(페트라 인근 지방으로 추정)와 다마스쿠스에서 지낸 다음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올라 간 목적은 케파(베드로의 아람어 이름, ‘반석’을 뜻함)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올라가서 보름 동안 함께 지냈다. 이 때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만났다. 보름 동안 지낼 때 아마 그는 누이네 집에 머물렀을 것이다(사도 23,16 참조).


갈라티아서의 맥락에 머물러 보면, 이 때 바오로는 자신이 회심한 다음 곧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삼 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올라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언뜻 보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표현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표현은 바오로가 전파하고 있던 복음이 인간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적(神的)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변호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갈라티아서의 구절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바오로에게도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별로 필요 없는 것이었다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케파와 야고보를 만났다는 것을 갈라티아 교우들에게 굳이 강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2. 사도 9,26-30 : 바오로(사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바르나바의 중재


갈라티아서 1장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처음 올라갔을 때 일어난 일들 가운데에서 바르나바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이 때 바르나바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갈라 2,1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회의’ 때 바르나바가 바오로와 함께 올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바오로의 첫 째 예루살렘 방문 때에도 바르나바가 그를 동반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사도 9,26). 이 말씀처럼 바오로(사울)가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신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교회를 박해까지 했던 그를 교우들이 선뜻 받아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바르나바가 큰 역할을 한다. 바르나바는 이미 그 당시에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 안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인물이었는데(사도 4,36-37 참조), 그는 바오로의 회심이 참되다는 것을 알아본 다음, 그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바오로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그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활동(선교활동 포함)할 수 있도록 중재해 주었다(사도 9,26-28 참조). 후일 바오로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지도자로 크게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바르나바의 중재 덕분이었다(사도 11,25-26 참조).



(14) 1차 예루살렘 방문 후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던 시기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1차 예루살렘 방문 때,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바르나바의 중재 덕분으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에 받아들여져, 사도들과 함께 담대히 설교도 하며 그리스말을 하는 유다인들과 토론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분노하여 바오로를 잡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리스말을 하던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은, 말하자면 바오로가 과거에 교회를 박해할 때 함께 활동했던 바오로의 동지들인 셈인데, 과거에 그랬던 바오로가 이제 자신들을 향하여 예수님에 관하여 설교까지 하려고 하자 분노가 치밀었던 것 같다. 그를 배신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자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오로를 그의 고향 타르수스로 보냈다(사도 9,26-30).


다른 한편, 갈라티아서(1,21)에는 간단히 바오로가 1차 예루살렘 방문 후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다고만 적혀 있다. 이 당시 시리아 지방의 수도는 안티오키아였고, 킬리키아 지방의 수도는 바오로의 고향인 타르수스였다. 갈라티아서에는 바오로가 이 때 이 지방들의 어느 도시에서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유다 땅에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갈라 1,23-24)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바오로가 잠적해 있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선교활동도 한 것이 틀림없다. 갈라티아서(2,1)에 의하면 이 기간이 약 14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의 바오로 행적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곳은 안티오키아였다.



역사의 도시 ‘안티오키아’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막료 장군의 한 사람이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설립자이기도 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기원전 300년에 ‘오론테스’강 유역에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세운 도시였다. 이 도시(현대의 Antakya, 터키의 영토)는 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강 하구에 ‘셀레우키아’라는 항구를 끼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가 선교 여행 중에 배편으로 안티오키아에 오고 갈 때에는 바로 이 셀레우키아 항구를 이용했던 것이다(참조 사도 13,4).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라는 찬란한 과거의 역사를 갖고 있던 안티오키아는 바오로 시대 때에도 로마제국의 속주 시리아의 수도로서 도시의 규모 면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안티오키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시리아 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군사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안티오키아에는 그리스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이 도시에는 유다인들의 회당도 여러 곳에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이 도시에서 이민족들(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빨리 형성되어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초창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놀랍지 않다.



(15)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바르나바와 함께 한 활동


안티오키아 신앙 공동체의 탄생(사도 11,19-26)


그리스도교의 초창기 역사에서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예루살렘 공동체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교의 탄생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곳은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의 후원 센터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에서 ‘안티오키아’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 11,19이다. 사도 11,19-26에서 루카복음사가는 안티오키아에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세워지던 초기 과정을 전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19).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그리스도 신자들은 주로 ‘헬레니스트’, 곧 그리스말을 하던 유다인들(사도 6,1 참조)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들 중 일부 사람들이 그 당시 대도시였던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초기에는 유다인 회당을 중심으로 주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결과도 아주 좋게 되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사울)의 재회와 복음화를 위한 공동 작업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이 잘 전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교회는 자신들의 전폭적 신임을 얻고 있던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바르나바까지 도착하자 안티오키아에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날로 커 가면서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는 동반자가 더 필요하게 되자, 바르나바는 그동안 유다인들의 위협을 피해 타르수스에 가 있도록 했던(사도 9,29-30 참조) 바오로(사울)를 그곳에까지 직접 찾아가서 데려온다(사도 11,25-26 참조). 그리고 복음전파의 일을 함께 수행한다. 이를 보면 바르나바는, 비록 바오로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었고, 복음 전파와 관련된 바오로의 탁월한 여러 능력(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설득력 등)을 알아보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동안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지내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 때 처음으로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26). 이무렵 유다 지방에 기근이 크게 들었던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바르나바와 바오로(사울)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대표로 파견되어 유다의 교우들에게 구호헌금을 전하기도 하였다(사도 11,27-30; 12,25).


안티오키아 교회가 생겨나게 된 계기가 스테파노의 일 때문에 생겨난 ‘박해’였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이런 역사에서 우리는 교회가 박해나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면서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굳세어지고 커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16)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 - 그 시작(사도 13,1-3)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의 후원 센터(본부)였던 안티오키아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안티오키아는, 마치 사제들에게 있어서 출신 본당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후일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의 여러 지역에 가서 두루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직접 체험하며 자신이 계시로 받은 깨달음을 확인하거나, 초기 사도들의 전승을 배워 익혔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이곳에서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면서 장차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했다. 아니, 주님께서 그를 그렇게 준비시키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의 출발지와 귀착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가 위와 같이 활동하고 있던 안티오키아였다.



바르나바와 함께 한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의 시작(사도 13,1-3)


루카는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에 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인 “예언자들과 교사들” 다섯 명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사도 13,1). 그런데 이 다섯 명의 출신지역이 다양하다. 첫 자리에 언급되는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섬 출신으로, 예루살렘 사도들이 안티오키아에 파견한 사람이었고, 둘째로 언급되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은 ‘니게르’(라틴어로 ‘검은’을 뜻함)라는 별명이 있는 것을 보면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셋째로 언급되는 루키오스는 아프리카 북단의 키레네 사람이고, 넷째로 언급되는 마나엔은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고 하니 예루살렘 출신일 것이다. 그리고 끝에 언급되는 사울은 타르수스 출신이었다. 루카는 안티오키아 교회가 이렇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1차 선교여행(사도 13,2-14,28)은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사망한(44년) 후에 시작되었다(사도 12,20-23). 2차 선교여행과는 달리,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은 바오로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이 1차 선교여행은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단식하며 기도한 뒤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3)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나바와 사울(바오로)을 파견한 것은 엄밀히 말해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이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루카는 성령께서 단식하며 기도하고 있던 안티오키아 공동체에게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사도 13,4)고 기록하였다. 이 점은 루카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성령은 교회의 창립과정에서뿐 아니라 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이끌어 가신다.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기도와 단식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청하는 자세이다.



(17)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 - 키프로스 섬과 페르게에서(사도 13,3-13)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은 바르나바와 함께 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르나바가 주도하고 바오로는 동행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은 “바르나바와 사울”이라고 ‘바르나바’의 이름이 먼저 언급된다는 점에서도 드러나고, 사도 14,12에서 리스트라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고 부르는 반응에서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사도 13,43 이후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라고 언급된다. 참조로 보면, 루카는 사도 13,9에서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사울’(사울로스)라고만 부르다가 사도 13,9 이후에는 ‘바오로’(파울로스)라는 이름만 사용한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다마스쿠스 회심 장면을 회상할 때에만 나온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요한’이라는 젊은이를 조수로 데리고 갔다(사도 13,5). 이 요한은 사도 15,37에 의하면 마르코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콜로 4,10에 의하면 이 요한 마르코는 바르나바의 사촌이었다. 사도 12,12에 의하면 이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정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다음 처음 찾아간 곳은 바로 이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의 집이었다.


1차 선교여행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셀레우키아 항구 출발 - 키프로스 섬(살라미스-파포스) - 팜필리아의 페르게 -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 이코니온 - 리스트라 - 데르베 (여기서부터 돌아서서 역순으로) - 리스트라 - 이코이온 -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출발지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옴.


이 여행 가운데 루카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하는 일화는 키프로스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먼저 키프로스 섬에서 있었던 일을 보겠다. 바오로의 일행이 안티오키아 도시에 딸린 항구라고 볼 수 있는 셀레우키아를 떠나 첫 목적지로 삼고 간 곳은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이었다. 그들은 살라미스 항구에 들러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다음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 항구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총독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그를 개종시킨다. 이 때 유다인으로서 거짓 예언자인 바르예수라는 마술사가 총독의 개종을 막으려고 술책을 부리려다가 바오로의 추상같은 말로 인해 벌을 받게 되었다는 일화도 실려 있다. 그런데 루카에 의하면, 총독은 그 마술사가 기적적으로 벌을 받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2,12).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갔는데, 여기서 요한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헤어져 (안티오키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이때 그들이 헤어지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도 15,37-38에 의하면 이 일 때문에 2차 선교여행 때 바오로는 요한 마르코를 동행시키자는 바르나바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하여 결국 바르나바와도 결별하게 된다.



(18)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 -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사도 13,14-52)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페르게를 떠나 험준한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루카는 이 도시에서 바오로 일행이 한 전교활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사도 13,14-52). 사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바오로 사도 당시에 소아시아(오늘날 터키) 남부 내륙지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25년에 기존에 있던 이 도시로 퇴역한 로마 군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로마의 식민시(콜로니아)로 삼은 이후 이 도시는 더욱 발전했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관례에 따라 안식일에 유다인들의 회당을 찾아간다(13,5의 키프로스 섬의 회당들에서 한 활동 참조). 마침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난 다음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격려의 말씀”(15절)을 청하자, 바오로가 이를 ‘주님의 말씀’(44.48.49절)을 전하는 좋은 계기로 삼는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행한 바오로의 설교(13,16-41)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오로의 설교 가운데 첫 번째이며 상당히 길다. 루카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처럼, 바오로 사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한 설교를 매우 중요하게 제시한다. 바오로의 설교의 내용은 구원의 역사를 성조 아브라함시대부터 요약하는 것인데, 이 구원의 역사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데서 그 절정에 이른다(23절).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설교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선포이다. 즉, 이 구원자 예수를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 지도자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처형시켰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셔서, 구원자로 삼으셨고 그분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념해 볼 부분은 루카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를 ‘의화론(義化論)’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다.“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38-39절).


바오로는 첫 번째 안식일에 설교를 할 때에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 다음 안식일에는 제대로 설교도 못하고 유다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그 도시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들을 배척하는 유다인들을 향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다음과 같이 담대히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13,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다인들의 배척이 계기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향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만민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47절).



(19) 이코니온과 리스트라 선교와 1차 선교여행의 마무리(사도 14장)


이코니온 선교(사도 14,1-7).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이코니온으로 갔다. 이곳에서도 ‘믿기를 거부한’ 일부 유다인들의 선동이 있었지만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것을 개의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다.


리스트라 선교(사도 14,8-20). 이곳에서는 태생 앉은뱅이 한 사람이 바오로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기적이 일어났다. 이 일을 목격한 군중들이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라고 말하며 바르나바는 그리스의 최고신인 제우스 신으로, 바오로는 신들의 전령(메신저) 역할을 하는 헤르메스 신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깜짝 놀라 “옷을 찢고”(이 행위는 극도의 슬픔이나 분노를 드러냄)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 다음과 같이 외치며 말렸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15절; 10,26 참조).


리스트라 선교 과정 끝에는 선동을 받은 군중들이 바오로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한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바오로가 이미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는데, 다행히 그리스도 신자들이 둘러싸자 바오로가 정신을 차려 일어났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죽다가 살아난 바오로가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20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복음을 전하려고 한 바오로의 선교 열정과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선교여행의 마무리(사도 14,21-2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공동체를 다시 들러 교우들을 격려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22절) 이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는 로마서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루카 9,23도 참조). 그리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돌아가는 길에 교회마다 ‘원로들’을 임명하였다(티토 1,5 참조)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가 전파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형제자매들의 신앙공동체에 합류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신앙생활은 혼자 외롭게 가는 길이 아니라, 사랑하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가는 길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의 출발지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로 돌아가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27절) 이 말씀에 의하면 ‘선교’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이 이루어낸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해 주신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20) 이방인들의 수용을 둘러싼 안티오키아 교회의 내적 갈등과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들의 회의’(사도 15,1-35)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회의’(49년경)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회의의 결정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다교 율법이 요구하는 수많은 규정들(특히 할례와 음식 관련 규정들)의 멍에를 벗고 ‘자유롭게’ 이방인 선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이 없었다면 아마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한 분파 정도로 머물렀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리스도 신자들은 ‘새로운 계약’을 살지도 못하고 ‘옛 계약’ 속에 머물러 버렸을 것이다.


사도들의 회의가 열리게 된 계기. 사도들의 회의는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가 활발히 전개된 것을 전제한다. 사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초창기부터 이방인들(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을 향한 선교가 활발히 진행되던 곳이었다(사도 11,21-22 참조).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오로가 바르나바가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에 안티오키아 교회 안에 큰 문제가 생겨났다. 문제의 발단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공적으로 보낸 사람들이 아닌(7-21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연설을 참조), ‘어떤 사람들’이 안티오키아까지 내려와, 유다인이 아닌 교우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모세 율법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1절)고 주장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 대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논쟁이 커지자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다른 몇 신자들을 ‘대표단’으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파견하였다. 그들의 유권적 해석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대표단은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와 사마리아를 거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예루살렘 교회에 자신들의 이방인 선교 체험(“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 4절)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베드로 사도의 변호.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제기한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모인 사도들과 원로들 앞에서, 제일 먼저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 자신의 이방인 선교 체험(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출신 백인대장 콜르넬리우스를 개종시킨 이야기를 참조)을 바탕으로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유다인이 아닌 다른 민족 출신 교우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8-11절)


야고보(주님의 형제)의 변호. 베드로의 연설 후에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이방인 선교 체험을 증언한다. 이어서 사도들의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의 역할을 하고 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 참조)가 연설을 한다. 그는 우선 베드로의 주장이 성경 말씀에도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을 길게 인용한다.



(21) 예루살렘 ‘사도들의 회의’ 제2부(사도 15,19-35) : 사도회의의 결정과 야고보의 단서[조항]


야고보의 제안(사도 15,20)은 곧 바로 사도들의 회의 전체의 결정사항이 되는데, 이 결정사항의 중심 내용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율법규정들의 멍에를 가능한 한 씌우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도들의 회의의 결정과정은 ‘성령의 작용’으로 이해되어 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9; 참조 21,25).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총을 통해 선사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가능한 한 보호하려 했던 사도들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자유’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바오로 사도의 친필 서간에서 매우 강조되어 있다(특히 참조. 갈라 2,4; 5,1.13; 4,4,6-7; 로마 8,15). 그런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결정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조항이 들어가 있다. “다만 그들[이방인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사도 15,20).


이른바 ‘야고보의 단서[조항]’은 적지 않은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함께 섞여 살고 있던 이방인 지역의 교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 신자들은 원칙적으로 율법의 규정들의 멍에에서 자유롭지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대단히 혐오하던 일들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이란 이방인 신전에서 제사 지낸 다음 시장에 내다 파는 고기를 의미한다. ‘불륜’은 이곳의 맥락에서 보면 유다인 혼인법에서 금지하는 ‘근친상간’(레위 18,6-18)을 뜻하는 것 같다. 당대 지중해 인근의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근친결혼’이 자주 있었다.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해야 한다.”는 조항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과 관련되어 있다(레위 17,10-16). 레위기에 의하면 ‘피’는 생명의 원천으로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죄를 벗는 제물로서 제단에 바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레위 17,11). ‘목 졸라 죽인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런 고기에는 ‘피’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고기요리를 준비할 때 짐승 몸통의 피가 다 빠지게끔 한다.


회의 결정사항은 문서(편지)로 정리되어 지역교회들(안티오키아, 시리아, 킬리키아 지역의 교회들)에 전달된다. 이 때 사도들과 원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후일 바오로의 동료 선교사가 된 ‘실바누스’와 동일 인물)를 선발하여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파견하였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사절단이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공적인 권위를 강조한다. 이 때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에게 다음과 같은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준다.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은 사람들입니다.”(26절).



(22) 제2차 선교여행의 시작과 새로운 동역자들과의 만남(사도 15,36-16,5)


예루살렘 사도들의 회의에 다녀온 후, 바오로는 자기와 바르나바가 주님의 말씀을 전했던 교회들을 찾아가 신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돌아보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바르나바에게 제안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자고 주장하였는데, 바오로가 이 제안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바오로는 지난 번 선교 여행 때 요한 마르코가 팜필리아에서 혼자 돌아간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서로 독립하여 선교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자기 고향 키프로스(사도 4,36 참조)로 떠나가고, 바오로는 실라스를 동행하고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후일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서를 쓸 때에는 마르코도 바오로 사도와 함께 있었다(필레 24절). 의견 충돌로 인한 그들의 헤어짐은 일시적이었던 것이다. 실라스(1테살 1,1에 나오는 실바누스와 동일인물)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선발되어 사도들의 회의의 결과를 안티오키아 교회에 공적으로 전달하였던 두 사람(사도 15,22) 가운데 하나였다. 실라스는 바오로처럼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사도 16,37-38).



티모테오와의 만남(사도 16,1-3)


바오로와 실라스는 우선 바오로가 이미 1차 선교여행 때 들린 적이 있던 오늘날의 터키 남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그곳 교회들의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지역 중의 하나인 리스트라라는 곳에서 바오로는 그의 여생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전파의 동역자’가 될 ‘티모테오’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티모테오의 어머니는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으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2티모 1,5에 의하면 티모테오의 어머니 이름은 에우니케였고, 할머니 이름은 로이스였다. 두 사람 다 매우 돈독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티모테오는 바오로로부터 여러 교회에 여러 번 파견되었다. 예컨대, 아테네에서는 테살로니카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고 그곳 교우들을 격려하라고 파견되었으며(1테살 3,1-5), 비슷한 목적으로 에페소에서는 코린토 교회에 파견되었다(1코린 4,17; 16,10-11). 사도 19,22도 참조. 필리 2,22를 보면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 대하여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러분은 그[티모테오]가 나와 함께 마치 자식과 아버지처럼 복음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의 경로(사도 15,36-18,22) : 기원후 50년경부터 52년 사이


바오로 일행은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킬리키아를 포함한 오늘의 터키 남동부 지방을 두루 다닌 다음 갈라티아 북부를 지나, 처음으로 오늘의 유럽 땅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 첫째 도시는 필리피였다. 그 다음에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아테네를 거처 코린토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8,11에 의하면 1년 6개월 동안 체류함).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에페소에 잠시 들린 다음, 카이사리아와 예루살렘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3) 선교여행의 시작과 새로운 동역자들과의 만남(사도 15,36-16,5)


1. 역사의 도시 ‘테살로니카’.


테살로니카는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제2의 대도시로서 번창한 도시이지만, 사도 바오로의 일행이 도착해서 활동했을 때에도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기원전 315년에 도시설립)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로서 매우 번창하던 곳이었다. 큰 항구였던 이 도시는 발칸 반도를 동서로 횡단하는 일종의 고속도로라고 볼 수 있는 ‘에냐시아 도로’와 항구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활발하게 교류되던 곳이었다. ‘이민족들의 사도’로 하느님께 부름을 받고 파견되었다고 자신을 이해하고 있던 바오로(갈라 1,16; 로마 11,13)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던 곳을 선교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 테살로니카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설립


사도 17,1-10을 참고하면서 1테살 3장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그의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필리피에서 실바누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테살로니카로 피신해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정성된 선교활동의 결과 테살로니카 교회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교회의 모범이 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다(1테살 1,7-8; 2,13). 그러나 유다인들의 시기와 선동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 바오로 일행은 테살로니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3. 테살로니카 1서의 집필배경


사도 바오로는 그의 동료들(티모테오와 실바누스)과 함께 테살로니카를 떠나 여러 곳을 거쳐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박해를 당하고 있던 테살로니카 교우들의 사정이 너무나 걱정이 되어, 그곳 사정을 알아보고 오라고 티모테오를 파견하였다(1테살 3,1-2). 다행히, 바오로가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와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티모테오가 테살로니카 공동체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 사랑, 희망 속에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오로가 매우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쓴 편지가 바로 테살로니카 1서이다(1테살 3,6-10; 1,2-10 참조).


그런데, 이른바 ‘갈리오 비문’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가 증거하고 있듯이, 테살로니카 1서는 51년 경에 코린토에서 발송된 것으로서, 지금껏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 바오로의 편지 중 가장 오래 된 편지이며 동시에 신약성서 전체 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글로 기록된 것이다. 51년이라 한다면 그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있은 지 20년 정도밖에 안 되던 때로서, 역사적인 예수사건에 대한 목격증인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때였다. 따라서 이때에 쓰인 테살로니카 1서는 바오로의 복음선포를 통해 그리스 땅에 막 형성된 그리스도 공동체의 참신한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게 하는 편지이며 선교활동 초기에 사도 바오로를 움직였던 기본 신학이 무엇이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24) 테살로니카 1서의 주요 말씀 I


1.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1테살 1,4)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이라는 호칭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크다(로마 1,7도 참조). 이 호칭에 벌써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 신앙인’의 신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자신을 포함한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들’이고,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 시선으로 교우들을 바라보았다. 이 점은 여기 테살로니카 1서에서는 간단하게 언급만 되어 있지만, 후일 기록된 다른 편지들에서는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전개된다(1코린 12,13; 갈라 3,28; 4,6; 로마 8,15; 에페 2,19). 이 구절들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자들은 모두, 혈연적으로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종적으로 서로 다르더라도(‘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사회적 신분이 서로 다르더라도(‘종이나 자유인이나’), 성이 다르더라도(‘남성이나 여성이나’)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있다. 따라서 그들의 상호관계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형제자매의 관계이다.



2. ‘환난 속에서도 가질 수 있는 기쁨’


“그리고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1테살 1,6)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바오로는 그들의 이 태도가 자신을 포함한 선교사들뿐 아니라 ‘주님을 닮는’ 태도라고 말한다.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에 고통(환난)과 기쁨은 일반적으로 양립(兩立)하지 못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간직했다는 것은 바오로에게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렇게 할 능력을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베푸신 이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기쁨’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자. 갈라 5,22-23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 사랑 다음으로 언급되는 열매가 바로 기쁨이다(‘성령과 기쁨의 관계’에 관하여는 특히 로마 14,17; 로마 8,15 참조). 무릇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많은 시간과 여러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기며 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사는 삶의 나무에서 ‘사랑, 기쁨, 평화 등’의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성령의 기쁨’이란 순간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 맡기는 긴 과정을 갖고 있는 기쁨이며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가능한 기쁨이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사도 바오로 자신이 이러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다.



(25) 테살로니카 1서 3장의 주요 말씀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길 빕니다.”(1테살 3,12-1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랑의 고리를 볼 수 있다: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 ‘여러분이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하여 지니고 있는 사랑’.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랑을 주님께서 더욱 성장하게 해 주시기를 빌고 있다.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의 도움 없이는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참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조차 우리 자신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랑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는 이 말씀은 “[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라는 1요한 4,7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사실, 바오로 사도 자신이 교우들을 향하여 지녔던 그 ‘헌신적 사랑’의 원천도 주 하느님이었다.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있던 사랑(갈라 2,20; 로마 8,32.35.39 참조)이 그의 모든 사랑의 원천이었다. ‘사랑의 고리’에 관한 말씀은 요한 17,26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요즈음 우리가 지극한 존경과 사랑으로 추모하고 있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유언처럼 남기고 가신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생전의 김 추기경님께서도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교우들의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어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도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라, 또 김 추기경님의 유지에 따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동시에 그 사랑을 주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해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하겠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환난 속에서도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제 살았습니다.”(1테살 3,7-8) 


이 말씀을 읽으면, 박해 받고 있던 테살로니카 교우들을 떠나온 다음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는 듯하다. 바오로 사도가 교우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깊이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위의 말씀은 동시에 선교사로서 바오로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내 준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었다. 문맥을 보면, 과연 그가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밤낮으로 걱정하고 그 많은 수고와 고생을 감내하였는지 (1테살 3,5.10; 2,2.8.9), 그리고 그 많은 재난과 환난 속에서도 어디에서 위로를 받았으며(3,7), 어디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하느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복음선포를 들은 (듣는)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26) 테살로니카 1서 2,9; 4,11 : 때로는 노동까지 하며 선교하였던 바오로 사도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바오로 사도의 선교 자세를 알아보는 데서 바오로가 복음 전파를 위해 때로는 밤낮으로 일[노동]도 하였다는 1테살 2,9의 말씀은 중요하다. 바오로는 선교 활동을 하면서 되도록이면 교우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필리 4,15 참조). 그 대신 직접 일(노동)을 하여 선교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곤 했다(사도 18,3에 따르면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한 이유는 교우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사적(私的)인 일로 받으면 복음 전파를 내세워 사리사욕이나 채우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 쉬우며, 그렇게 되면 복음 전파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고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실질적으로 가난한 교우들이 많았을 초창기 교회의 상황에서 가난한 교우들에게 가능한 한 경제적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교우들로부터 경제적(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는 것 자체가 원칙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필리피 교우들에게는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다(필리 4,15-18).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모금을 하기도 했다(로마 15,26-28; 1코린 16,1-4; 2코린 8―9; 갈라 2,10).


바오로 사도가 직접 육체적 일도 하였다는 언급은 1테살 2,9외에도 다음과 같이 여러 곳에 나온다. 2테살 3,7-8; 1코린 4,12; 9,6; 2코린 11,7-11.27; 사도 18,2-3. 이렇게 선교를 위하여 때때로 직접 노동까지 한 바오로 사도는 1테살 4,11에서 다음과 같이 교우들에게 권고한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구약성서적 전통에서는 노동이 결코 천시되지 않았다. 노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었다(창세 2,15 참조). 하지만 수많은 전쟁을 통해 많은 노예들을 거느렸던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을 천시하였다. 그것은 종들이나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보면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유다인이 아니었던 테살로니카 공동체 교우들에게 “제 손으로 일하여 조용히 살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대단히 새롭게 들렸을 것이다. 그 권고는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육체적 일은 건강한 몸뿐 아니라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정신은 교회의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 내려온다. 이는 베네딕도 성인의 유명한 표어 “기도하고 일하라.”(라티어로 ora et labora)가 교회의 역사에서 미친 영향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 “제 손으로 일하여 조용히 살라.”는 권고는 테살로니카 1서의 집필 배경을 고려해 보면, 주님의 재림을 둘러싼 지나친 열광주의를 경계하는 역할을 한다(2테살 3,6-12 참조). 주님의 재림이 다가온다면 그 재림에 대한 희망 속에 더욱 착실히 현재를 살아가야지 무질서하게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27) ‘은둔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선교의 삶’


바오로 사도의 선교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피하는 ‘은둔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선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많은 사람이 모이고 그래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며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겪고 있는 삶의 현장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믿고 살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많은 박해도 받게 되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여러 환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늘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기쁘게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다. 바오로의 이런 삶과 가르침은 다음 권고에 압축되어 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하느님의 뜻인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


위의 말씀은 가장 잘 알려진 사도 바오로의 말씀 가운데 하나다. “이것이 [···]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끝 문장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여기서 권고하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태도는 그가 다른 편지들에서도 여러 번 강조하는 것들이며,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감사와 기도가 없는 삶에서 ‘신앙의 기쁨’이 생길 리 없다.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아, 모든 면에서 아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감사할 곳도 없고, 그만큼 기뻐할 곳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반면에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 자체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총)이라고 이해하고 사는 사람은 감사하며 기도하며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기쁨과 감사와 기도’의 권고를 하기 전에 공동체의 교우들 상호간의 ‘사랑’을 매우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기도와 기쁨’은, 이웃 형제자매들을 향한 ‘감사와 기도와 기쁨’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살 수 있기 위해, 서로 영적으로뿐 아니라 물적으로도 도와주며 살아야 한다. 요즘과 같이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기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뜻대로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불쌍하고 고통받는 이웃도 보듬어야 한다.


참조로 말하자면, ‘감사’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정신은 가톨릭교회에서 거의 모든 미사 때마다 사용하고 있는 ‘감사송’의 시작 기도에 종합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28) 코린토 1서 : ‘뿌리를 잃고’ 살던 도시 사람들을 향한 복음 선포


1. 역사의 도시 코린토 시(市)에 관하여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코린토 시는 수많은 전쟁과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고고학적 유물들로만 알아볼 수 있는 곳이 되었지만, 본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예로부터 상업이 번창했던 도시였다. 이 시는 폭이 약 6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지협을 관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남북으로는 육로로 남쪽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북쪽의 그리스 본토를 이어주고, 양쪽에 있는 항구(리카이온 항구과 켕크레애 항구)를 통해서는 이탈리아 반도와 소아시아 지역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코린토 시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아카이아 지역 도시국가 동맹의 구심점 역할을 하다가, 로마의 보복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후 약 100년 동안이나 폐허로 버려져 있다가, 기원전 44년에 코린토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 영어로는 ‘쥴리어스 시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도시’(Colonia)로 재건되었다가, 기원전 27년부터는 아카이야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아테네도 아카이야 속주에 속하였지만, 주 수도는 아테네가 아니었다. 그러니 코린토 시는 사도 바오로가 기원후 51년경에 처음 방문하였을 당시(사도 18,1이하 참조)에는 인적·물적·문화적 교류가 다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 국제적 상업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그리스 본토는 물론 소아시아, 시리아, 유다, 이집트 등 여러 곳에서 ‘해방된 노예들’도 많이 와 살았다.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곳을 그의 선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코린토 시는 양쪽 항구를 통해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종교도 들어와 시험을 받는 곳이었다. 일종의 종교 박람회가 열리던 곳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역사적 사정을 고려해 보면 과연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교우들에게 왜 다음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잘 된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1코린 8,5).



2. 코린토 1서의 중요성


코린토 1서는 바오로 사도가 3차 선교여행 때 에페소에서(55년 경 봄에) 코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써 보낸 편지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를 통하여 익숙해 있는 팔레스티나의 농어촌적 환경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젖어 있으면서 로마적 분위기도 겹쳐있던 그리스의 한 상업도시(그 당시로서는 대도시 중의 하나)와 이 큰 도시 속에 작은 공동체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의 모습을 만난다. 비록 규모가 매우 작고 이방인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던 교회였지만, 이들 교회를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1코린 1,2)라고 당당하게 부른다. 이 서간에서 우리는 기원 후 51년부터 55년 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약 25년 정도 지난 후, ‘그리스도의 복음’이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세계로 전파되어 나가는 그 초기단계의 모습이 어떠했었는지 한 단면을 보는 셈이다. 이렇게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의 산 증언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도 코린토 전서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29)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인 ‘부활 신앙’의 의미(1코린 15장을 중심으로)


1. ‘부활신앙의 중요성’과 부활신앙의 두 방향


우리는 ‘부활 신앙’하면 즉시 ‘예수님의 부활’ 신앙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이라는 말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예수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시다’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출발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채로 그대로 계신 분이셨다면, 그분의 삶과 죽음이 아무리 훌륭하였다 하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 과정을 통해 흩어졌던 제자들은 다시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마르 14,50.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1코린 15장을 바오로 사도가 쓰게 된 계기는 코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 중에서 일부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다(1코린 15,12)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그를 매우 염려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바오로에게 있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앙 내용 중의 하나 정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을 그리스도 신앙이게 하는 근본적인 것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 즉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는 태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1-11절)도 제대로 믿지 않는 태도였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다(12-58절).



2. ‘부활신앙’의 의미


첫째, 부활신앙은 “부활하여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으라”고 초대한다. ‘예수 부활 복음’이 주는 제 1차적인 메시지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참조 요한 3,16; 로마 8,32 등), 부활하여 우리를 위하여도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잊는다 하여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그분, 주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활신앙은 ‘죽은 이들의 부활’ 곧 장차 우리도 죽은 다음에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굳게 가지라고 초대한다. 부활 신앙은 육체적 죽음으로 우리의 존재가 허무의 바다에 분해되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존재(非存在)에서 존재(存在)로 불러내시는”(로마 4,17 참조) 창조주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 그러나 우리 인간 각자의 고유한 인격의 정체성(identity)이 확인될 수 있는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믿으라고 초대한다.


이러한 부활신앙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현세의 삶이 우리 인생의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세상 욕심거리에 필사적으로 집착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 현실에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예컨대, ‘행실에 따른 하느님의 심판’이 남아 있다). 다음 호에는 ‘부활신앙과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의미’에 관하여 다루겠다.



(30) 부활신앙’과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의미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신앙’이고 부활신앙은 근본적으로 ‘희망’의 특성을 갖고 있다. 1코린 15장의 후반부(12-58절)의 긴 말씀은 바로 이 희망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데 ‘죽은 이들의 부활’, 곧 ‘장차 죽은 다음에 있게 될 우리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이미 이 현세 안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오로는 1테살 4,13에서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비슷한 관점에서, 베드로 1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결국은 죽고 썩어 없어질 운명에 놓여 있던 인류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1베드 1,3). 사실,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이 냉철하게 인생을 특히 인생의 끝부분만을 바라본다면, “인생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하였고, 많은 재물과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고, 대부분 어둡고 긴 터널과도 같은 외로움과 고통의 ‘죽음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겪고 난 다음에, 그 몸은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고 만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은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마지막을 향하여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인생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근본 메시지인 ‘부활신앙’은 바로 이런 인생의 궁극문제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초대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 인류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다고 믿는다(1베드 1,3 참조).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도’, ‘나를 위하여도’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믿음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희망, 그래서 ‘죽음의 문턱까지 넘어서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물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공동번역 2코린 4,8-10.11ㄴ). 그런데 그리스도 신자가 가질 수 있는 이런 ‘희망’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그 힘’이다! 이 점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곳은 로마서 8장 끝의 말씀들인데, 여기서는 한 구절만 인용한다. “죽음도 삶도 ···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참조. 로마 8,32.35).



(31)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23).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은 ‘표징’을 요구하던 유다인들에게도, ‘지혜’를 추구하던 그리스인들에게도 다 믿기 어려운 메시지였다. 사실 누구보다도 바오로 자신이 그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웠는지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아 대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가 나타나 압제자인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강력한 권능을 과거에서처럼 다시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고대해 왔다. 복음서를 보면 군중이 예수님에게 ‘표징’(기적)을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표징’과 ‘지혜’를 주시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와 ‘십자가에 처형됨’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곧 권능이요, 영광이며 승리를 의미했으며, ‘십자가에 처형됨’은 약함이요 모멸이며 실패를 의미했다. 그런데 중죄인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메시아’라고 선포한다는 것은 위와 같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지혜를 찾던 그리스인들에게는 ‘십자가’는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는 무능과 치욕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세상 지혜’의 관점에서만 볼 때, 바오로의 복음 선포는 분명히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바오로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을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힘으로 체험되었던 것이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22-25)


위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힘찬 말씀으로 다가선다. 이 말씀은 ‘세상 지혜’를 내세우며 ‘바벨탑’ 같은 오만을 쌓느라고 이웃도 하느님도 잊고 살기 쉬운 우리들 모두에게, “와르르 무너지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는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사건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 신앙인은 결코 ‘세상의 지혜’를 앞세우면서 잘난 척 할 수 없게 된다. 위에 언급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십자가에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를 잊게 되면, ‘하느님’이 신앙생활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오히려 인간의 욕심에 오염된 ‘세상의 지혜’가 중심에 서게 되며, 그렇게 될 경우에는 코린토 1서가 증언하듯이 공동체에 ‘다툼’과 ‘분열’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1코린 1,12-13 참조).



(32) 성 바오로 사도의 삶과 가르침 (최종회)


그리스도 신자들의 기쁨과 평화, 자유와 희망의 원천인 ‘성령을 통해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로마 5,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복음(福音)’이 문자 그대로 왜 ‘기쁜 소식’인지 가장 쉽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자들은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살아가는 사람들(갈라 3,27; 로마 6,3-5 참조)로서, 그분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영’이신(로마 8,9-10 참조)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갈라 4,6-7; 로마 8,15).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담뿍 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1테살 1,4; 로마 1,7도 참조)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자들의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며, 그들의 자유와 ‘불굴의 희망’의 근거이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이 외적으로 원하는 대로 잘 풀려갈 때에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로마 5,3 참조).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로마 5,8)


로마 5,6-11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났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그 요점은 8절의 다음 말씀에 나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1요한 3,16; 4,10도 참조). 사실 여기 로마 5,6-11의 작은 단락 안에는 거의 모든 구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는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였는지를 반영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찬미(로마 8,31-3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5-8장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장엄한 어조로 확인한다. 이 말씀은 보면 볼수록,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고 살았는지를 느끼게 하며, 바로 이 사랑이 그의 사도직의 원동력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위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를 본받아, 온갖 어려움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말고, 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드러나고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살라고 초대한다.


[2008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 2009년 6월 25일 연중 제13주일 의정부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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