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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yyddgim 2010. 4. 20. 15:15

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1. 왜 태어나는가?


죽음은 태어남에서 생긴다. 죽음과 태어남은 윤회하는 삶의 주된 특징으로, 어리석음(무명無明)의 힘을 알맹이로 삼는다.

참으로 우리들의 삶이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꿈 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이같은 어리석음의 파동이 겹겹이 일어나서 업業을 키워나가는 삶이 이뤄지고 있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의 삶은 컴퓨터의 기억장치처럼 삶의 모든 행동의 뿌리가 되어버린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력은 ‘나와 맞다’ 또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같은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지어낸다. 그래서 힘살, 뼈, 피 따위를 ‘나’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앞뒤 안 가리고 이 나를 지키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사람들은 업력에 따라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미움 따위를 가린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업력이 같은 사람이 모이면 친근감이 생기고 업력이 다른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성글어진다. 이른바 정신없이 어지러운 ‘탁濁’이 생기는 것이다.

업력은 몸으로써 자기를 한껏 나타내려고 한다. 또 고집된 ‘나’로 하여금 이득이 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한마음으로 차차 눈, 코, 귀, 혀, 촉각신경과 생각하는 기능 같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어낸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형성되면 고집된 가짜 ‘나’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활동은 먼저 바깥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저마다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같은 바깥과의 접촉은 어머니 배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교胎敎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접촉에 따라 여러 가지의 느낌이 아주 민감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고 맞선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격이 바뀌면 좋아하지 않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에 좋거나 나쁜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업력의 차이일 뿐이다. 무엇을 좋아하면 그것을 가지려는 행위로 이어진다. 소유욕이 그것이다.

가지려는 욕심도 소유욕이지만 갖지 않으려는 욕심도 소유욕이다. 중생은 이같은 방식으로 ‘나’라는 몸뚱아리를 끝까지 소유하고 싶어서 가지가지 억지를 부린다. 이것이 중생의 삶인데, 죽음은 이런 삶의 저편에 있는 것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던져 준다.


2. 왜 죽는가?


중생의 삶이란 무명의 업력이 일으킨 파장이다. 그렇다고 중생의 삶이 업력 하나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업력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함께 해야 중생의 삶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태어남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경전에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천만겁을 헤맨다.” 했다. 이 말을 새겨보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움, 한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게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 때문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누구를 죽이거나 삿된 음행, 거짓말, 도둑질을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짐승이나 지옥처럼 만들어 죽으면 바로 그런 업의 힘에 따라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된다. 업력에 따라 받은 몸을 ‘보신報身’이라 하고 업력에 따라 받은 세계를 ‘보토報土’라 한다.

태어난 뒤로도 많은 조건들에 따라 업력이 바뀌어가고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하면 죽게 된다. 사람마다 업력이 다르기에 목숨도 저마다 다르다. 목숨은 결코 신이 정해준 것이 아니다. 목숨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는 말씀처럼 아주 마땅한 이치다.

중생은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생의 원인이 내생의 결과가 됨을 알지 못한다. 만약 삶의 진실을 깨달아 인과에 눈을 뜨지 않으면 윤회하는 삶의 괴로움은 태어날 때마다 이어질 것이다.

중생의 생명은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조건의 형성으로 태어나고 조건의 이어짐으로 살아가고 조건의 무너짐으로 시들어가고 조건의 없어짐으로 죽는다. 이것이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변치않는 네 가지 과정인 것이다.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면 살아가기에도 좋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일은 수행에 필요한 길이 된다.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오직 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무생無生(나지 않음)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3. 죽음이란 무엇인가?


중생은 저마다 업에 따라 몸과 세계를 받는다. 사람들은 업력과 환경이 비슷하기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이같은 삶의 조건들이 사라지면 업력도 바뀌고 보고 듣는 세계도 바뀐다.

이처럼 업이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을 불교에서는 전류轉流라 한다. 현대과학에 빗대어 말하면 업력은 전파와 같다. 같은 세계에 태어난 중생은 한 전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사라지면 전파가 바뀌고 세계가 달라진다. 죽은 사람은 이제 더는 있었던 세계를 볼 수 없고 산 사람은 죽은이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텔레비젼 채널 1과 채널 2의 전파가 틀려서 채널에 따라 화면이 달라지는 현상과 같다. 중생은 지난 생의 업력에 따라 새로운 몸과 세계를 받는다. 이같은 진실은 어떤 신의 이름을 불러도 바꾸어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는 자성(자기라고 고집할 만한 성품)이 없어서 저마다 허상일 뿐이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태어남과 죽음의 관계를 밝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 방법을 준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왜 불교도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이런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매우 어긋나는 말이다.

업력이 끝나지 않았다면 마땅히 과보를 받아야 한다. 과보를 받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오히려 나쁜 업을 짓게 되어 다음 생에는 더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된다.

죽음을 맞는 준비란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과 그 끝을 알아 모든 생명이 다 거쳐가는 과정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날마다 염불하면 업력이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죽을 때 윤회가 사라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염불수행을 정성스레 하면 스스로 죽을 날짜를 알 수 있고 병고가 없이 맑은 선정禪定 속에서 극락왕생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염불과 인연을 맺지 못한 불자나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이들이 죽음을 맞을 때 스스로를 구제하는 자기구제법을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구제법이란, 비록 나쁜 내생의 길이 나타나도 그 길에 들지 않고 정토에 태어나는 특별한 법이다.

 

출처:http://www.daewonsa.or.kr/webbase/community/dc18.aspx?cat=&page=1&sk=&s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