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우주론
특집/ 우주의 기원-우리들은 누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누구나 자부합니다. 그러나 막상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이 우주의 근원은 어디에서 부터 비롯된 것인가. 필경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진리란 있는 것인가.... 무엇 하나 분명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참모습, 존재의 참모습, 모든 존재의 근원적 실재, 절대적 주체적 진리, 생명의 실제를 눈앞에 불을 대고 "이것을 보라"하듯이 명백하게 들어 보이셨습니다. 앞으로 이 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풀어질 '생의 의문'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 능한 객관적 검증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주제별로 현대 과학적 탐구내용을 함께 실어갈 것입 니다.
이번 호에는 현대물리학이 밝히는 우주의 기원과 불교의 우주론을 통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주 의 생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특집1/불교의 우주론
글. 고익진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아주 명확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구약 성서 제 1장 창세기 첫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나니라"는 말이 나온다. 우주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동양 민족의 생활 윤리를 지배해온 유교도 아주 간결한 해답을 해주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근사록(近思錄)』 첫머리에 "극(極)이 없음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은 극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고요해짐은 음(陰)을 낳고 고요해짐이 극에 이르러 다시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양이 결합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을 발생하고 음양 오행이 결합하여 천지 만물을 발생시켜 무궁한 변화를 계속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우주의 근원을 신(神)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유교는 그것을 역(易)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우주에 대해 서 기독교와 유교는 그 견해를 이렇게 달리하고 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부처님은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어 에 의한 해설을 좀처럼 베풀려고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 시니 않은 것에 대해서 매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세계는 유한한가 무상한가.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한가.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는 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는가....."
그런데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로 만동자의 이러한 질문이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 움이 되지 않나니, 네가 성급하게 알고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사실과 나 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중아함 전유경(箭喩經)』에 나오 는 유명한 이야기다.
부처님은 이렇게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언어에 의한 답변을 피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으셨던가. 결코 그 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명쾌하게 설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그러한 곳에 종교적 진리에 대한 부처님 자신의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고 있다.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과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변은 그것을 덮어놓고 제시하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해명을 하였느냐에 뜻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우주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된다고 보고 계신다. 첫째는 존우화작인설(存祐化作因說)로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 인이 신[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 숙작인 설(宿作因說)은 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로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으로서 사문들을 이곳에 포함시 킬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 가지 우주론에 대한 진리성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계신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 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 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 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이 고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中阿含) 권3 도경(度經)』"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우주론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 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이 런 업.보의 인과율에 의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업.보가 삼세에 걸쳐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 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업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중아함 권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업설은 또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하다. 불교의 업 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業力)'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안에 있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현하 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所成)'이라고 말하고 있다.
업설은 불교의 우주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장아함 끝 『세기경(世記經)』이나 또는 그 별행경 이라고 볼 수 있는 『기세경(起世經)』.『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등에 좋은 예가 있다. 아함경 의 교리를 체계화한 『구사론(俱舍論)』을 통해 그 요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風輪)이 생한다. 중생들의 업 력에 의해 다시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을 생하고, 업력에 의해 다시 수륜 위에 바람 이 일어나 수면을 응결시켜 금륜(金輪)을 생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洲)이며, 이 밑에 염마왕국(閻魔王國)이 있고, 그 아래 다시 8대 지옥이 차례로 위치한다. 그리고 해와 달, 별들은 수미산을 싸고 공중에서 돌아간다. 이것이 중생 들이 몸 담게 될 세계가 형성된 다음 이곳에 중생이 생하게 되는 것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 하는 이러한 세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 무수한 세 계가 존재하고 있다. 세계는 실로 무량하여 허공의 양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바는 세계의 생성을 '중생의 의지적 업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변천 소멸 그리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업력에 의한다는 입장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신학적인 우주론이나 또는 성주괴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보는 우주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이러한 업보설로 다한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미묘한 교리가 그 뒤 에 다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업설에서 육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궁극 적 물음에 대한 답변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근원적 힘 요소 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괴로운 생사에 전락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층적으로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우주론 을 거론한다는 것부터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는다. 이보다도 더 간결한 우주론이 있을까.
『법화경』에는 "우주의 실상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 받는다"고 하였다. 우주의 실상은 깨 달음을 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불교는 우주의 궁극적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독특한 방식 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지워진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은 그것을 쉽게 제시하였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답게 제시되었느냐 하는 곳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진지하게 궁극적 진리를 구하려는 사람들께 불교는 결코 실망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한 고(故) 고익진 교수의 저서인 『하나님과 관세음보 살』에서 '우주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문제'를 편집부에서 초록, 양해를 얻어 실었습니다.
우주의 모습
양형진
지금으로부터 150억 년 전의 어느 날 우리의 우주가 시작되었고, 45억 년 전의 어느 날 그 우주 안에 지구라는 천체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시 10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지나면서 기묘한 인연의 화합에 의하 여 지구에는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35억 년 동안 무기물의 변모와는 본성상 질적으로 다른 생명 진화의 역사가 계속되어 오늘날에는 150여 만종의 다양한 생물체가 지구 위 살게 되었다.
그 다양한 생물종 중의 하나이면서 겨우 수백만년 전에 지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낸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 어 있지 않은 문제까지를 포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는 외적으로 자연 현상의 배후 원리와 우주 근원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나란 무엇인가하는 자신에 대한 내적 성 찰의 문제에 이르르게 되었다. 외적인 문제를 다루는 인간 동의 영역을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학이라고 한다면,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역은 종 교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 외적인 대상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믿을 만하게 설명하였던 학문이 현대물리학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내부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면서 마침내 그 모든 외적 조건으로부터의 완전한 자 유 즉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불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물리학과 불교라는 인간의 이 두 가지 정신 활동은 시간적으로 2,5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다루는 내용이나 방식마 저도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을 위주로 하는 현대물리학의 세계 이해가 오직 명 상만으로 이루어진 불교적 세계관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불가사 의를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경험하게 되었다. 이 두 세계관이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 정신이 미숙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때의 인간은 자 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아집에 사로잡 혀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고, 태 양은 우리 은하를 이루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전의 세계관이 상정하였듯이 인간이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 다는 생각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조상을 가졌으니 일체동근이며, 다른 모 두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일체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대과학이 이룩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연에 대한 이해는 불교 의 연기론(緣起論)에 있다고 본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나 자신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하여 본다면, 그 크기가 크다고 할 수 있 는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외도 없이 그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를 가 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상호연관이라는 연기 에서 의해서만 현현할 뿐이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인연이 화합하면 잠시 존재하고 인연이 별리하면 허망하게 흩어질 뿐이므로 제행무상(諸行 無常)이다.
그 좋은 예가 밤하늘의 별이다. 수소라는 성간물질이 모여 별을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변화해 가다가 마침내 소멸하여 형체가 없는 단계 에 이르는 우리 은하의 천체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성주괴공(成住壞 空)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 우주전체는 그대로가 제법무아이고 제 행무상인 연기(緣起)의 장(場)일 뿐이다.
이는 커다란 천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의 궁극적 구성 물인 원자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런데 이 양성자와 중성자의 내부에서는 무수한 소립자들이 순간순간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 이들의 전형적인 수명은 10(-23승)초라고 하니 찰 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굳이 이름을 붙여 생멸이라고 하지만 이쯤되면 본체로서가 아니 라 현상 그 자체만을 본다하더라도 생도 없고 멸고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상태에서 있음과 있음, 있음과 없음은 상호연관이라는 망으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순간에 그들이 현현한다 하여도 실로 있는 것 이 아니요. 어느 순간에 그들이 멸한다 하여도 실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 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상호 연관의 문제는 다만 원자라든가 천체라는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칸트나 뉴턴이 생각하였던 절대공간이나 절대 시 간과는 달리, 현대물리학에서의 공간은 물질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며, 시간도 또한 공간과 상호연관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전체와의 상호연관 위에서만 비로소 저의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중중무진 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라 고 한다. 이 시공간의 문제는 대폭발 이론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폭발이란 단지 거대한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거대한 폭발과 같이 멀찌감치 서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고, 대폭발 이 전의 우주의 모습이 무엇이냐라든가 아니면 대폭발이 일어났던 지점이 우 리 우주의 어디냐는 질문은 으예 성립되지도 않는다. 대폭발은 문자 그대 로 우주의 시작이므로 대폭발과 함께 시공간이 시작되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대폭발 이전이란 우리의 우주 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 이며, 대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우리 우주 전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던 절대 시간 이나 절대 공간은 잘못된 개념이며 시공간마저도 우리 우주와의 연관에서 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까지 포함하여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 하게 된다. 색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자체는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요소가 화합하여 연기하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무자성공 (無自性空) 혹은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는 색성공(色性空) 즉 색의 성품 이 그대로 공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현대물리학의 우주관은 색을 떠나서 공이 존재하지 못하며 공 을 떠나서 색이 존재하지 못하는, 색체즉공(色體卽空), 공체즉색(空體卽色) 이라는 불교의 우주관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이에 관한 논의 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진공 개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지 만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연기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하며, 공성을 가명이 라고도 한다."고 하여 공가중 삼제원융(空假中 三諦圓融)의 도리를 밝히셨 다.
*양형진 님은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서 학사, 석사, 인디에나 대학 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 조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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