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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과 소

yyddgim 2015. 7. 24. 22:27

화가 이중섭과 소

 

보고 싶은 사람을 오래 못 보게 되면 차츰 잊혀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보고 싶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두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미쳐 버린 화가가 있다.

 

 

이중섭. 그가 간지도 어언 45년. 천재화가의 불우했던 생은 그가 남긴 많은 그림에 더욱 싶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중섭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들어간 뒤 예일대학 미술과 수석졸업자 임용련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그는 20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유화과로 옮겨 그림 공부에 몰두한다. 문화학원의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 (山本方子)는 일본 제1의 재벌 미쓰이(三井)물산의 자회사인 일본창고 주식회사 사장의 딸. 두 사람은 국적도 달랐지만 신분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한국 유학생 이중섭을 깊이 사랑하여 프랑스 유학의 꿈까지 접는다. 중섭은 결혼을 약속하긴 했지만 졸업 후 일본에서 직장을 구할 형편이 못 되어 혼자서 귀국한다. 마사코 가족의 결혼 반대는 당연한 일. 일본인 여자와 한국인 남자의 결혼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온갖 욕설과 손가락질을 감내하기로 한다. 

 

사랑에 목숨을 건 당찬 여인 마사코. 홀몸으로 바다를 건너 원산까지 찾아온 그녀와 1945년 5월 결혼식을 올린 이중섭은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붙여준다. 남쪽(일본)에서 얻은 여자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대다수 한국인이 창씨개명을 하던 시절에 일본인이 한국인 이름으로 개명했으니 참으로 특이한 경우였다. 마사코는 중섭만을 믿고 현해탄을 건너 오긴 했지만 한국은 말도 다르고 풍습과 음식맛도 달랐다. 이중섭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상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이중섭이었다. 왜 이중섭은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40년 5개월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해방이 되고 얼마 뒤 북한은 공산치하가 되었고, 화가와 그의 아내의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11월 조카까지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범일동 피난민 창고 생활, 제주도로 가 해초와 게로 연명, 부산으로 다시 가 산동네 단칸방 생활, 유엔 군부대의 부두 노동자로 이어진 이중섭의 생활고는 너무 심해 도저히 네 식구를 거둬 먹일 수가 없었다. 

 

한국에 온 지 7년7개월 만인 1952년 12월, 마사코는 마침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간다. 그 무렵 조카 영진도 군에 입대하여 중섭은 홀로 남게 된다. 이때부터 중섭의 예술혼은 더욱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지만 생활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심리적으로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그려도 일본으로 돈 한푼 부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온통 소, 닭, 까마귀,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피눈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다음해 겨울 이중섭은 친구들이 여비와 해운공사 선원증을 마련해 주어 일본행 배를 탄다. 사위를 본 장모는 노발대발, 엄청난 모욕을 준다. 금쪽같은 내 딸을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그 분의 입에서 어떤말이 나왔을런지...가족과 재회한 기쁨도 잠시, 중섭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일주일 만에 귀국한다.

 

그때부터 화가는 미치기 시작했으리라..가족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아들한테 자전거 사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이중섭은 만나는 사람마다 잘못했다고 백배 사죄하는가 하면 식음을 전폐하는 거식증을 앓아 깡말라간다. 성가병원, 수도육군병원, 청량리뇌병원, 적십자병원 등을 전전하다가 화가는 1956년 9월에 숨을 거두었다.

 

수혈도 거부하고 영양주사도 거부하고 식사도 거부하던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간염과 영양실조였다.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사흘이나 방치되어 있던 시신을 친지들이 뒤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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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소 그림

 

 

노을 앞에 울부짖는 황소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당시 이 시를 본 이중섭의 조카가 "삼촌 시도 써요?" 하니까

 

이중섭 왈 "그냥 소가 말한 걸 옮겨적었지.." 한다.  

 

 

 

조카가 웃으며 "소가 조선말을 참 잘 하네요" 하니까

 

이중섭은 "조선 소니까.."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근데 소눈이 예전 같지가 않아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 흐려졌어..

 

소는 이중섭에게 운명적인 오브제였던 것이다.

 

 

 

표현재료의 독창성과 실험 정신이 돋보였던 창작 활동

 

 

 

 

소와 아이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9×14cm), 1941년 3월 30일

 

  

 

떠 받으려는 소

 

 

 

물고기를 들이받는 소

 

  

 

사람과 소와 말

 

 

  

 

소에 대한 경의

 

  

 

소와 새와 게

 

  

 

소와 어린이

 

  

 

여인과 소와 새

 

 

 

 

흰 소

 

  

 

이중섭은 소를 그리기 위해 하루종일 들에 나가 소를 관찰했다고 한다.

 

고향인 오산에서 시작된 소에 대한 탐구는,

 

사업을 하는 형을 따라 생활하게 된 원산에서도 이어진다.

 

"원산 송도원 부근의 농부들이 날마다 나타나서 하루 해가 저물도록

 

소를 보고 있던 중섭을 처음에는 소 도둑인 줄 알고 고발한 일도 있었대요."

 

 

"어떤 농부는 그를 미친놈이라고 쫓기도 하고 아마도 소 도둑이나 소 백정에 미쳐서

 

소 옆에만 나와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대요."

 

이렇게 그 당시의 이중섭에 대한 체험을 말하는 원산의 증인도 있다.

 

 

사물은 그것을 객체로 대하는 동안 곧 혐오감이 생기거나 싫증이 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물과 사물 관계자는 절연되기도 한다.

 

그 절연을 어떤 인식이나 사랑, 지혜를 통해서 극복하고 사물을 자기화하는 것이

 

가장 깊은 철학이며 가장 좋은 문학이고 예술인 것이다.

 

이중섭은 그런 일을 해낸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