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서울주보의 '말씀의 이삭'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소설가 최인호님의 투병기입니다.
http://cc.catholic.or.kr/txt/02/seoul_jubo.asp
2012.01.08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2009년 10월, 암이 재발하여 본격적인 항암요법이 시작된 후 일주일 만에 제1차 치료를 끝났을 때 제 체중은 5kg이 줄어 있었습니다. 밥은 물론 물도 한 모금 삼키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다시는 항암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으며 주치의에게 선언하였습니다. “때려죽여도 다시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소.”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제 머릿속에 줄곧 떠오르던 것은 성 바오로의 충고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1데살 5,16)
그것은 모순의 진리였습니다. 고통으로 기도의 말조차 떠올릴 수 없었으며, 기쁨은커녕 감사의 마음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자, 일어나 가자!’라고 비장한 출사표를 던지기 직전에 이렇게 유언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 14,27)
그러나 저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기뻐할 수가 없었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주님이 주는 평화를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믿는 그리스도는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강제적으로 강요하는 사이비교주란 말입니까.
저는 육신의 고통보다도, 천지창조 이전부터 사랑해 오신 하느님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진리의 성령을 믿는 가톨릭 인으로서 도저히 그리스도의 평화를, 그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적 지도 사제이신 곽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떼를 썼습니다.
“신부님, 저는 항암치료를 포기할 것입니다.”
며칠 후 저는 우연히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만을 데리고 겟세마니 동산으로 올라가 근심과 번민에 싸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마태 26,38)
아아, 그때 느낀 마음의 위로는 얼마나 강렬했던지요.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신 주님도 ‘근심’과 ‘번민’에 싸여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고통을 호소하였는데, 그렇다면 저의 고통과 두려움은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요.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라고 한탄하신 걸 보면 아아, 주님도 얼마나 고독하셨던가요.
그래, 주님과 더불어 한 시간만이라도 깨어 있자. 내 고통은 주님과 함께 깨어 있는 영혼의 불침번과 같은 것이니, 다시 시작하자. 항암치료의 자명종을 통하여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자.
바로 그 무렵 저는 예수의 성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이라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고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정말 필요한 것이면 보아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몸 걱정, 죽는 걱정을 단번에 끊어버릴 결심이 없으면 평생 아무 일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무엇이든 올 테면 오라지요. 죽은들 어떻습니까. 몸뚱이가 우리를 조롱한 것이 몇 번인데, 우린들 한두 번쯤 그놈을 조롱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꼭 믿어주십시오. 이러한 결심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도우심을 입어 몇 번이고 이와 같이 해나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육체의 ‘지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지상의 모든 환자 여러분. 성 데레사의 말처럼 육체의 지배자가 되십시오. 주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육체의 원수를 정복하고 우리가 승리할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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