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마음,영혼공부/영성영화공부

신나이영화-천국보다아름다운

yyddgim 2010. 1. 22. 14:49

가장 친밀한 사이, 특히 가족과 진심으로 소통하기에 대한 이야기

천국보다 아름다운 (What Dreams May Come, 1998)

 

영혼의 주요 인생공부 중 커뮤니케이션 공부의 마스터에 도움되는 영화로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과 가슴 속 깊이 진심으로 소통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친구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가족들과 관계는 왠지 불편하고 꺼려지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대략적 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소아과 의사 크리스와 화가인 애니는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얻는다. 여기까지 그들에겐 행복한 삶뿐이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러 아이를 모두 교통사고로 잃어버리자 가정은 파탄이 난다. 애니는 괴로움에 지쳐 크리스와 이혼한다. 4년 뒤 크리스는 애니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애니에게 달려가던 크리스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절망한 애니는 자살을 선택한다." - 씨네21 영화정보 인용

 

영화 소개에서는 저승을 넘나드는 환상적 로맨스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영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도 전화 통화 중에 사과나무님의 소개로 영화 속에 담긴 소통과 관련된 내용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신과나눈이야기>에서 저승과 관련하여 언급하는 영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진심으로 소통하기 공부인, 커뮤니케이션 공부를 마스터해 나가는 과정은, 유능한 소아과 의사인 크리스의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먼저 교통사고로 잃은 두 아이와 자신의 죽음 이후 자살을 선택한 부인과 재회하게 됩니다. 유능한(유능함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능한) 의사였던 크리스의 가족들과의 재회 과정이 바로, 주인공 크리스의 커뮤니케이션 마스터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크리스는 소위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천국(자기가 창조한 체험의 장)에서 자살한 그의 부인이 있는 지옥(유황불 지옥은 존재하지 않지만, 스스로 체험하기로 창조한 공간)으로 가는 여정 동안, 자신의 조언자와 길잡이의 모습으로 변하여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의 영혼과 대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현실 삶에서 유능한 의사이고, 모범적 아버지이고, 멋진 남편이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지 못했고, 그들의 문제에 진심으로 공감을 표하지 못했던 삶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부인에게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부인에게 아이들의 죽음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며 조언하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옆에서 물리적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부인의 진짜 문제를 알지 못했고, 진심으로 그녀의 문제에 공감하지 못했고, 결국 가슴으로 소통하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자각은 현실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영화를 다시 살펴보면, <신과나눈이야기> 3권에서 이 영화에 대해 소개하는 부분이 영혼의 커뮤니케이션 인생공부의 마스터라는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신나이에서는 말합니다. 이 모든 과정, 즉 커뮤니케이션 인생공부를 마스터해 나가는 과정을 포함해서, 그 모든 영혼의 바람이 죽음 이후에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룰 수 있다고 ....



다음은 <신과나눈이야기> 3권 (p117)에 나와있는 해당 영화의 소개부분을 발췌하여 옮깁니다.


‘궁극의 현실’에서는 ‘존재’ 자체를 빼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하는 식의 지옥 체험을 포함해서, 너희가 선택하는 모든 하위 현실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네 지적은 정확하다. 나는 이 대화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너희가 지옥을 체험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희가 체험하는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희는 그것들을 체험한다.


이건 정말 믿기 힘들군요. 바네트 베인이라는 제 친구가 얼마 전에 이 문제를 다룬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정말 딱 이 문젭니다. 제가 이 문단을 쓰는 지금은 1998년 7월입니다. 저는 지금 이 문단을 2년 전에 적은 문단들 사이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지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려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읽고 있자니 생각이 나더군요. “가만 있어봐! 얼마 전에 로빈 윌리암스가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바로 이 문제를 영화에서 다루었잖아.” 그 영화 제목은 <천국보다 아름다운 What Dreams May Come>인데, 놀랍게도 방금 당신이 말씀하신 걸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도 그 영화를 알고 있다.


당신이 아신다고요? 신이 영화관에도 갑니까?


신은 영화도 만든다.


우와!


그렇다. 너는 <오, 신이시여Oh, God>(조지 번스 주연의 영화― 옮긴이)를 못 보았느냐?


글쎄요, 아 물론. 하지만......


어째서 너는 신이 오직 책만 쓴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로빈 윌리암스 영화는 말 그대로 사실입니까? 제 말은, 그게 진짜냐는 겁니다.


아니다. 신성을 다룬 어떤 영화도, 어떤 책도, 혹은 인간의 다른 어떤 설명도, 말 그대로 사실인 건 없다.


성경도요? 성경도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닙니까?


아니다. 나는 네가 그걸 안다고 생각하는데.


저, 이 책은요? 이 책은 당연히 글자 그대로 사실이겠죠!


아니다.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싫지만, 너는 이 책을 너 개인이라는 체filter로 걸러서 가져오고 있다. 네 체의 그물눈이 이제 갈수록 더 엷어지고 더 가늘어진다는 건 인정하마. 너는 아주 좋은 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체다.


저도 압니다. 다만 그걸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책과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영화를 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말리고 싶고요.


그 영화의 작가와 제작자들은 불완전한 체로 거르긴 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굉장한 진리들을 제시했다. 그들이 그려내려던 핵심은, 너희는 체험하고 싶어 하는 꼭 그대로를 죽고 나서 체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자, 이제 본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다만 그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걸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지옥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지옥을 체험한다면, 이 지옥은 뭐가 다른 겁니까?


너희 스스로 창조한 현실에 남아 있는 한,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런 현실을 영원히 창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소위 ‘나노세컨드’(10억분의 1초― 옮긴이)라 부르는 극히 짧은 순간밖에는 그것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의 상상이라는 은밀한 영역에서조차 슬픔이나 고통의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평생 동안 그런 자리가 있고, 제가 저지른 어떤 짓 때문에 그런 자리에 던져져도 마땅하다고 믿어왔다면 무엇이 영원히 그런 곳을 창조하는 저 자신을 막아줄 수 있습니까?


네 앎과 이해가.

이승에서 너희의 다음 번 순간이 너희가 지난번 순간에 얻은 새로운 이해들에서 창조되듯이, 소위 저승에서도 너희는 앞서 알고 이해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순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거기서 금방 알고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너희는 언제나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후에는 결과들이 즉각 나타나기 때문이니, 너희라도 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런 생각이 창조해내는 체험 사이의 연결 관계를 놓칠 리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자신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행복한데,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무서운지, 또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의미심장한데,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실상 무의미한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직후의 순간들에 벌어지는 상황을 놓고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도요.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한 임사(臨死)체험을 하고 돌아와 두 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겁에 질려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을 만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요.


영혼은 마음의 가장 강력한 제안에 반응하고 그것을 재창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빚어낸다.

어떤 영혼들은 그런 체험 속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것을 아주 현실처럼 만든다. 심지어 몸을 가진 동안의 체험들―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에 머무를 때조차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반면에 재빨리 자신을 적응시켜 그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새로운 생각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당장에 새로운 체험들로 옮아가는 영혼들도 있다.


당신 말씀은 사후라고 해서 상황이 존재하는 무슨 특별한 방식 같은 건 없다는 건가요? 우리 마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 같은 건 없다는 겁니까? 죽음을 거쳐 다음 현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신화와 전설과 가상 체험들을 만들어간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구속에서 풀려나는 건 언제입니까? 언제쯤에야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까?


너희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할 때. 이것이 바로 로빈 윌리암스 영화의 핵심이고, 여기서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존재 전체의 영원한 진리를 알고, 그 위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며, 그 웅장한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바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아니다, ‘위대한 유일 진리’는 있고, ‘종국의 실체’Final Reality는 존재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런 현실에 관계없이 언제나 너희가 택하는 바를 가질 것이다. 신성한 피조물인 너희는 너희의 현실을 성스럽게 창조하고 있다는 것― 때로는 그것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 바로 이것이 그 실체이기에.

하지만 너희가 개별 현실을 창조하길 그만두고 더 큰 현실, 통일된 현실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싶어한다면, 너희는 당장에 그렇게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런 선택과 그런 바램과 그런 의지와 그런 앎의 상태로 ‘죽는’ 사람들은 당장에 ‘하나됨’Oneness(‘하나임’으로도 번역― 옮긴이)의 체험 속으로 옮아간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경우에만, 바라는 만큼만, 또 바랄 때만, 비로소 그런 체험 속으로 옮아갈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몸을 지니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램의 문제, 선택하고 창조하는 문제, 궁극에 가서는 창조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하는 문제, 다시 말해 이미 창조된 것을 체험하는 문제다.

이것은 ‘창조된 창조자’The Created Creator요, ‘부동의 동인’이다. 그것은 알파요 오메가며, 전이자 후이고,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삼라만상의 지금― 그때― 항상의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