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의 글/차동엽 신부님의 글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대가들에게 배우는 기도1,
yyddgim
2014. 2. 9. 11:36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대가들에게 배우는 기도1,
끈질기게 싸워 얻어내는 것, 기도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깨달은 사실이다. 논문 주제를 정하고서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자료가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을 때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얼개를 잡고 관계 분야 전문학자들의 견해를 빌려가면서 논문의 대강을 작성해 갈 무렵, 논문 주제와 관련된 인식의 경계(境界)가 보이기 시작했다. 파악된 영역과 미지의 영역을 가름하는 선(線)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논문이 거의 종료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우연히 이제껏 보지 못했던 논문 주제와 관련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이 책 한 권은 논문 내용을 대폭 수정하게 할 만큼 그 분야 최고의 식견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때 필자는 깨달았다. 대가(大家)라는 것이 있긴 있구나! 지난날 읽었던 수백 권 책을 합친 견해보다 어떻게 이 책 한 권에 실린 견해가 그렇게 탁월할 수 있을까? 수십 명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해 도출한 결론보다 한 명의 '대가'가 집대성한 결론이 이렇게 다른 격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대가'를 찾는 것이구나.
기도에도 대가들이 있어 왔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에는 뛰어난 기도의 대가들이 많다. 성경에도 역경을 이겨낸 기도 대가들이 많다. 이제부터 기도 대가들에게서 기도 자세와 방법을 배워보기로 하자. 편의상 성경에 나타난 대가들에 국한해 대표적 인물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야곱의 기도를 통해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을 알아보자.
성경에서 야곱만큼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늘 하느님께서 동행(同行)하시는 삶이었다.
형 에사우가 받아야 할 이사악의 축복 기도를 몰래 가로채어 받은 야곱은 '죽이겠다'(창세 27,41)고 벼르는 형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길을 떠난다. 그 길은 장장 300여㎞에 해당하는 사막의 길이었다. 얼마나 험하고 위험했겠는가. 가는 길에 베텔에 이르러 하룻밤 머물게 되는데 그는 '돌베개'를 베고 잤다고 기록돼 있다(창세 28,12).
돌베개! 이것으로 그가 처한 사정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길을 떠날 때 웬만하면 괴나리봇짐 정도는 챙겨서 떠나는 법이다. 그리고 잠을 잘 때는 보통 그것을 베고 잠을 청하게 돼 있다. 그런데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다는 사실은 옷 보따리 하나도 손에 들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성급하게 도망 나왔으면 그랬겠는가. 여하튼 그는 잠을 청한다. 워낙 피곤에 지친 몸이라 들짐승을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하늘에 닿은 층계가 보이고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꿈을 통해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며, 후손의 복과 땅의 복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을 받는다(창세 28,12-15 참조). 그는 잠에서 깨어나 말한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말은 방금 돌베개를 베고서 잠을 청하던 때의 심정과 절묘한 대조를 이룬
다. 그때의 심정은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된 절대 고독,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고립감, 하느님의 부재에서 느끼는 불안감 등이 교차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 그리고 바로 그 시간에 주님 야훼께서 함께 하고 계셨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은혜인가!
오늘 우리도 살다 보면 달랑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될 때가 있다. 꼭 물질적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그런 정황에 처할 때가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때가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때이다.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비단 야곱을 위해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야곱과 비슷한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위해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믿자.
이렇듯 절망에 처해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께 야곱은 감사와 청원과 서원을 합해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이 기도를 통해서 야곱은 영적으로 비상한 흥정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성된 경배와 십일조를 담보로 그의 신변 안전과 생존을 보장받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기도는 응답받는다. 이점도 우리가 배울 점이다. 우리도 하느님께 드릴 것은 확실히 드리겠다고 서원함으로써 받을 것을 받아내는 지혜로운 '흥정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도다.
긴 세월이 흐른 후 야곱은 20년 객지생활을 끝내고 형 에사우를 다시 만나러 귀향길에 오른다. 야곱은 에사우의 비위를 맞추고자 선물과 가축들, 나중에는 자기 가족들을 보내며 인간적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 했지만 심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는 야뽁 강에 혼자 남아 두려움, 무력, 낙심에 처하게 된다. '형이 나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그 분노를 지금쯤 버렸을까. 장자권과 축복을 도로 달라고 하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어….'
그에게 생사 문제를 앞에 놓고 홀로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가 살길은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야곱은 밤을 새워가며 끈질긴 기도를 한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기도를 '씨름'이라고 했다. 날이 샐 때까지 씨름하듯 길고 힘든 기도였다.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하고 떼를 쓰며 드린 끈질긴 기도였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환도뼈를 다치게 된다. 환도뼈란 허리 아래 넓적다리에 있는 뼈를 말한다. 이곳을 생명의 근거지로 생각해 유다인들은 중요한 서약을 할 때 손을 환도뼈 밑에 넣곤 했다. 환도뼈가 다쳤다는 것은 생명을 내걸고 끈질긴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하느님의 응답을 받고 '하느님과 겨뤄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것이 기도다. 밤을 새워가며 환도뼈를 다칠 정도로 끈질기게 싸워 응답을 얻어내는 것, 이것이 기도인 것이다. -차동엽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그런데, 논문이 거의 종료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우연히 이제껏 보지 못했던 논문 주제와 관련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이 책 한 권은 논문 내용을 대폭 수정하게 할 만큼 그 분야 최고의 식견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때 필자는 깨달았다. 대가(大家)라는 것이 있긴 있구나! 지난날 읽었던 수백 권 책을 합친 견해보다 어떻게 이 책 한 권에 실린 견해가 그렇게 탁월할 수 있을까? 수십 명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해 도출한 결론보다 한 명의 '대가'가 집대성한 결론이 이렇게 다른 격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대가'를 찾는 것이구나.
기도에도 대가들이 있어 왔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에는 뛰어난 기도의 대가들이 많다. 성경에도 역경을 이겨낸 기도 대가들이 많다. 이제부터 기도 대가들에게서 기도 자세와 방법을 배워보기로 하자. 편의상 성경에 나타난 대가들에 국한해 대표적 인물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야곱의 기도를 통해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을 알아보자.
성경에서 야곱만큼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늘 하느님께서 동행(同行)하시는 삶이었다.
형 에사우가 받아야 할 이사악의 축복 기도를 몰래 가로채어 받은 야곱은 '죽이겠다'(창세 27,41)고 벼르는 형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길을 떠난다. 그 길은 장장 300여㎞에 해당하는 사막의 길이었다. 얼마나 험하고 위험했겠는가. 가는 길에 베텔에 이르러 하룻밤 머물게 되는데 그는 '돌베개'를 베고 잤다고 기록돼 있다(창세 28,12).
돌베개! 이것으로 그가 처한 사정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길을 떠날 때 웬만하면 괴나리봇짐 정도는 챙겨서 떠나는 법이다. 그리고 잠을 잘 때는 보통 그것을 베고 잠을 청하게 돼 있다. 그런데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다는 사실은 옷 보따리 하나도 손에 들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성급하게 도망 나왔으면 그랬겠는가. 여하튼 그는 잠을 청한다. 워낙 피곤에 지친 몸이라 들짐승을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하늘에 닿은 층계가 보이고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꿈을 통해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며, 후손의 복과 땅의 복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을 받는다(창세 28,12-15 참조). 그는 잠에서 깨어나 말한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말은 방금 돌베개를 베고서 잠을 청하던 때의 심정과 절묘한 대조를 이룬
다. 그때의 심정은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된 절대 고독,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고립감, 하느님의 부재에서 느끼는 불안감 등이 교차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 그리고 바로 그 시간에 주님 야훼께서 함께 하고 계셨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은혜인가!
오늘 우리도 살다 보면 달랑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될 때가 있다. 꼭 물질적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그런 정황에 처할 때가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때가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때이다.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비단 야곱을 위해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야곱과 비슷한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위해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믿자.
이렇듯 절망에 처해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께 야곱은 감사와 청원과 서원을 합해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이 기도를 통해서 야곱은 영적으로 비상한 흥정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성된 경배와 십일조를 담보로 그의 신변 안전과 생존을 보장받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기도는 응답받는다. 이점도 우리가 배울 점이다. 우리도 하느님께 드릴 것은 확실히 드리겠다고 서원함으로써 받을 것을 받아내는 지혜로운 '흥정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도다.
긴 세월이 흐른 후 야곱은 20년 객지생활을 끝내고 형 에사우를 다시 만나러 귀향길에 오른다. 야곱은 에사우의 비위를 맞추고자 선물과 가축들, 나중에는 자기 가족들을 보내며 인간적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 했지만 심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는 야뽁 강에 혼자 남아 두려움, 무력, 낙심에 처하게 된다. '형이 나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그 분노를 지금쯤 버렸을까. 장자권과 축복을 도로 달라고 하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어….'
그에게 생사 문제를 앞에 놓고 홀로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가 살길은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야곱은 밤을 새워가며 끈질긴 기도를 한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기도를 '씨름'이라고 했다. 날이 샐 때까지 씨름하듯 길고 힘든 기도였다.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하고 떼를 쓰며 드린 끈질긴 기도였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환도뼈를 다치게 된다. 환도뼈란 허리 아래 넓적다리에 있는 뼈를 말한다. 이곳을 생명의 근거지로 생각해 유다인들은 중요한 서약을 할 때 손을 환도뼈 밑에 넣곤 했다. 환도뼈가 다쳤다는 것은 생명을 내걸고 끈질긴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하느님의 응답을 받고 '하느님과 겨뤄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것이 기도다. 밤을 새워가며 환도뼈를 다칠 정도로 끈질기게 싸워 응답을 얻어내는 것, 이것이 기도인 것이다. -차동엽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대가들에게 배우는 기도2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하느님
성경에 나오는 응답받은 기도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른 방향의 기도들이 모두 응답받았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응답받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을 일소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기도도 들어주시고 '저런' 기도도 들어주시는 것이다. 요컨대, 틀린 기도는 없다는 것이다.
서로 대조를 이루는 대표적 예가 히즈키야의 기도와 한나의 기도이다.
히즈키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과거 자신의 공적을 늘어놓으면서 '그러니 좀 봐 달라'는 식으로 하느님께 매달렸다. 이를 테면 '공치사' 기도를 바친 것이다.
반면에 한나는 자식없는 서러움을 토로하면서 '앞으로 어찌어찌하겠으니' 자식 하나 낳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렸다. '외상' 기도를 바친 셈이다.
우리는 이 두 기도가 모두 응답받았다는 데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그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두 기도는 괄호를 이룬다. 그 괄호 안에 우리 기도가 들어가 있다.
유다 왕 히즈키야는 당시 왕들 중에서 비교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들을 준수했고,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다(2열왕 18, 1-8 참조). 전쟁 중의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께 좋은 모습으로 보여 승리를 가져다 주셨고(2열왕 19, 15-19; 35-37 참조), 또 백성들이 하느님께 죄지은 것을 대표하여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들으시고는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고쳐 주신다(2역대 30, 18-20 참조).
그런 히즈키야가 어느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곧 죽게 될 것이며 다시 회복하지 못하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느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고난에 처한 그는 벽을 쳐다보며 기도하고 통곡한다.
"'오, 야훼여, 제가 항상 당신 앞에서 참되게 살았으며, 충성스럽게 당신을 섬겼고, 당신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음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매우 슬프게 울었다.…"(2열왕 20, 3-6).
그는 눈물을 흘리며 절박하게 하느님께 매달리고 호소한다. 죽음 앞에 선 히즈키야의 기도 내용은 단순하다. 하지만 거기에 그의 심정이 속속들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네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병을 낫게 해주리라. 삼일 만에 너는 야훼의 전에 올라가게 되리라"(2열왕 20, 5).
과연 약속 그대로 됐다. 병을 고쳐 주시고, 앗시리아로부터 나라를 보호해 왕권도 튼튼하게 해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눈물' 흘려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게 된다. 기도와 눈물은 하느님께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 병은 기도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건강은 기도의 응답으로 오기도 한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기도였다. 하느님께서 재고(再考)하여 마음을 돌리시게 한 기도였다. 기도의 엄청난 힘은 하느님을 움직였고 하느님 명령을 변경시켰으며, 히즈키야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번복시키기에 이른다. 기도가 해낼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통해 이룰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네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시며, 기도에 응답을 하시며, 기도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정 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는 매우 혼란스러워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안정이 되지 않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하느님 뜻을 이뤄낸 사람이 사무엘이다. 그런 사무엘을 낳은 이가 한나였다. 한나의 기도는 성서에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울며불며 하느님께 매달리는 기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이다.
그는 "야훼께서 잉태하게 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1사무 1, 5)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이 일로 인해 한나는 자식이 있는 또 다른 부인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그는 마음이 아파 흐느껴 울며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이 계집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야훼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하겠습니다"(1사무 1, 11).
그의 기도는 맺힌 한에서 시작됐다. 인간이 풀래야 풀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처참하게 서 있는 처지에서 기도하게 된다. 한나는 그런 처지에서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기도한다. 아들을 달라고 한 그 기도는 당장은 한나 개인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지만, 그 한을 풂과 동시에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기도였다. 기도하여 얻는다고 해도 그를 자신의 자식으로 함께 데리고 살 수 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나는 그런 기도를 드린다.
또 하나, 한나의 기도에서는 부르짖음 가운데서 뜻을 이루기 원하시는 하느님 섭리를 읽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가 임신을 못하도록 하셨지만, 억울하고 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런 가운데 얻은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 뜻을 위해 바쳐지는 아들이 되게 하신다. 그가 '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1사무 1, 20)가 사무엘이다.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들 사무엘을 주신 것이다. 그녀는 기뻐하며 감사 기도를 올린다.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됐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1사무 2, 1).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한나가 하느님 섭리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한을 풀려고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기도하는 과정에 하느님께 바쳐질 아들로 알았고,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실 하느님 뜻까지 헤아리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열악한 처지와 형편을 통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분께 부르짖는 가운데서 하느님 뜻에 이르게 하신다. 개인의 한이 민족을 위한 부르짖음으로 그리고 하느님이 이루실 계획을 위한 준비로 승화되게 하실 수 있다.
서로 대조를 이루는 대표적 예가 히즈키야의 기도와 한나의 기도이다.
히즈키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과거 자신의 공적을 늘어놓으면서 '그러니 좀 봐 달라'는 식으로 하느님께 매달렸다. 이를 테면 '공치사' 기도를 바친 것이다.
반면에 한나는 자식없는 서러움을 토로하면서 '앞으로 어찌어찌하겠으니' 자식 하나 낳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렸다. '외상' 기도를 바친 셈이다.
우리는 이 두 기도가 모두 응답받았다는 데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그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두 기도는 괄호를 이룬다. 그 괄호 안에 우리 기도가 들어가 있다.
유다 왕 히즈키야는 당시 왕들 중에서 비교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들을 준수했고,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다(2열왕 18, 1-8 참조). 전쟁 중의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께 좋은 모습으로 보여 승리를 가져다 주셨고(2열왕 19, 15-19; 35-37 참조), 또 백성들이 하느님께 죄지은 것을 대표하여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들으시고는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고쳐 주신다(2역대 30, 18-20 참조).
그런 히즈키야가 어느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곧 죽게 될 것이며 다시 회복하지 못하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느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고난에 처한 그는 벽을 쳐다보며 기도하고 통곡한다.
"'오, 야훼여, 제가 항상 당신 앞에서 참되게 살았으며, 충성스럽게 당신을 섬겼고, 당신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음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매우 슬프게 울었다.…"(2열왕 20, 3-6).
그는 눈물을 흘리며 절박하게 하느님께 매달리고 호소한다. 죽음 앞에 선 히즈키야의 기도 내용은 단순하다. 하지만 거기에 그의 심정이 속속들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네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병을 낫게 해주리라. 삼일 만에 너는 야훼의 전에 올라가게 되리라"(2열왕 20, 5).
과연 약속 그대로 됐다. 병을 고쳐 주시고, 앗시리아로부터 나라를 보호해 왕권도 튼튼하게 해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눈물' 흘려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게 된다. 기도와 눈물은 하느님께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 병은 기도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건강은 기도의 응답으로 오기도 한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기도였다. 하느님께서 재고(再考)하여 마음을 돌리시게 한 기도였다. 기도의 엄청난 힘은 하느님을 움직였고 하느님 명령을 변경시켰으며, 히즈키야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번복시키기에 이른다. 기도가 해낼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통해 이룰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네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시며, 기도에 응답을 하시며, 기도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정 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는 매우 혼란스러워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안정이 되지 않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하느님 뜻을 이뤄낸 사람이 사무엘이다. 그런 사무엘을 낳은 이가 한나였다. 한나의 기도는 성서에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울며불며 하느님께 매달리는 기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이다.
그는 "야훼께서 잉태하게 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1사무 1, 5)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이 일로 인해 한나는 자식이 있는 또 다른 부인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그는 마음이 아파 흐느껴 울며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이 계집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야훼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하겠습니다"(1사무 1, 11).
그의 기도는 맺힌 한에서 시작됐다. 인간이 풀래야 풀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처참하게 서 있는 처지에서 기도하게 된다. 한나는 그런 처지에서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기도한다. 아들을 달라고 한 그 기도는 당장은 한나 개인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지만, 그 한을 풂과 동시에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기도였다. 기도하여 얻는다고 해도 그를 자신의 자식으로 함께 데리고 살 수 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나는 그런 기도를 드린다.
또 하나, 한나의 기도에서는 부르짖음 가운데서 뜻을 이루기 원하시는 하느님 섭리를 읽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가 임신을 못하도록 하셨지만, 억울하고 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런 가운데 얻은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 뜻을 위해 바쳐지는 아들이 되게 하신다. 그가 '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1사무 1, 20)가 사무엘이다.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들 사무엘을 주신 것이다. 그녀는 기뻐하며 감사 기도를 올린다.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됐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1사무 2, 1).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한나가 하느님 섭리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한을 풀려고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기도하는 과정에 하느님께 바쳐질 아들로 알았고,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실 하느님 뜻까지 헤아리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열악한 처지와 형편을 통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분께 부르짖는 가운데서 하느님 뜻에 이르게 하신다. 개인의 한이 민족을 위한 부르짖음으로 그리고 하느님이 이루실 계획을 위한 준비로 승화되게 하실 수 있다.
[차동엽 신부의가톨릭 이야기]-대가들에게 배우는 기도3
지혜로운 기도와 청
우리는 언어를 잘 사용해야 한다. 언어를 막 사용하면 사람이 억울하게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간혹 우리는 "그런 기도는 틀린 기도야!"라고 단정 짓는다. 이것은 무자비한 단정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신다.
'틀린 기도'는 없다. 다만 '수준 낮은 기도'가 있을 따름이다. 사람은 그 자신의 영성적 수준에 따라서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기도의 동기와 목적이 현세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다가 영적인 눈을 뜨면 점점 기도 지향이 초월적인 것, 곧 하느님을 경외함, 영원한 생명, 지복직관 등으로 고양(高揚)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수준이 낮은 기도도, 수준이 높은 기도도 모두 인정해 주신다. 눈높이를 맞춰주신다. 그러면서 각 사람의 영적 관심이 점차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 이끌어 주신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야베츠의 기도와 아구르의 기도에서 대조되는 수준 차이를 만나게 된다. 야베츠는 하느님께 '현세적인 축복'을 청했던 반면, 아구르는 "오로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응답받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구약에서 야베츠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다. 역대기 상 4장 9-10절에 그의 기도가 실린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야베츠를 찾아볼 수 없다. 그에 관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야베츠는 자기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내가 고통 속에서 낳았다'고 하면서 그에게 야베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야베츠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이렇게 빌었다.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가 청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1역대 4,9-10).
평범해 보이는 이 기도 뒤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놀랍고 강력한 진리가 숨어 있다.
첫째, 야베츠는 "부디 저에게 복을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히브리어로 '야베츠'는 '고통'을 뜻한다. 성서 시대에 한 사람의 이름은 대개의 경우 그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 이름은 순탄하지 못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야베츠 그는 적극적이고 간절하게 하느님께 복을 구했다. 하느님의 복은 구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 4,2).
복을 꼭 세상의 부귀영화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복들이 많이 있다. 이 복들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야베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주실 복을 하느님이 결정하시도록 맡겼다.
둘째, "영토를 넓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간혹 실패의 경험이 있을 때 '내 인생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건가? 내 인생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일까?'하고 실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야베츠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어!"라고 용기 있게 다시 일어설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이미 결정됐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토(領土)를 넓혀 달라고 청했다. 여기서 영토는 단지 땅(土)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평' 또는 '삶의 영역'을 뜻하는 것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
셋째, "주님의 손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영토(영역)를 넓히기 위해 너무 큰 일을 시도할 때도 있다. 때로는 실패도 한다. 야베츠는 자신의 영토가 넓어지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자 주님 도움이 필요함을 금방 알게 됐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한 손길'에 의지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구체적 삶의 질곡에서 하느님께 도움의 손길을 청할 줄 알았다.
넷째, "제가 환난을 벗어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다. 시험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굴복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야베츠는 "환난 속에서 나를 지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환난을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는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쳐 주신 것과 같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우리도 야베츠나 예수님과 똑같이 기도해야 한다. 유혹이나 환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유혹을 최대한 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구르의 기도는 잠언 30장, '아구르의 잠언' 내용 중 일부이다. 아구르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지혜도 없고 슬기도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지만 그야말로 진정 하느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그가 하느님께 간청한 첫째는 '허위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죽기 전의 소원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이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후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볼 때, 정말 헛된 것에 매여 산 날이 얼마나 많았나를 깨달은 자의 기도임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라는 기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넉넉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난하게 하지 마시고, 부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진정 무엇을 위해 부유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유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아구르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청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가 많아짐으로 인해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게 되기를 청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부유함보다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부족함이 낫다는 간구였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많은 것을 이루려 하고 많은 것을 누리려 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상기해야 한다. 하느님을 잃는 것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틀린 기도'는 없다. 다만 '수준 낮은 기도'가 있을 따름이다. 사람은 그 자신의 영성적 수준에 따라서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기도의 동기와 목적이 현세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다가 영적인 눈을 뜨면 점점 기도 지향이 초월적인 것, 곧 하느님을 경외함, 영원한 생명, 지복직관 등으로 고양(高揚)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수준이 낮은 기도도, 수준이 높은 기도도 모두 인정해 주신다. 눈높이를 맞춰주신다. 그러면서 각 사람의 영적 관심이 점차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 이끌어 주신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야베츠의 기도와 아구르의 기도에서 대조되는 수준 차이를 만나게 된다. 야베츠는 하느님께 '현세적인 축복'을 청했던 반면, 아구르는 "오로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응답받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구약에서 야베츠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다. 역대기 상 4장 9-10절에 그의 기도가 실린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야베츠를 찾아볼 수 없다. 그에 관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야베츠는 자기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내가 고통 속에서 낳았다'고 하면서 그에게 야베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야베츠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이렇게 빌었다.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가 청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1역대 4,9-10).
평범해 보이는 이 기도 뒤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놀랍고 강력한 진리가 숨어 있다.
첫째, 야베츠는 "부디 저에게 복을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히브리어로 '야베츠'는 '고통'을 뜻한다. 성서 시대에 한 사람의 이름은 대개의 경우 그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 이름은 순탄하지 못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야베츠 그는 적극적이고 간절하게 하느님께 복을 구했다. 하느님의 복은 구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 4,2).
복을 꼭 세상의 부귀영화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복들이 많이 있다. 이 복들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야베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주실 복을 하느님이 결정하시도록 맡겼다.
둘째, "영토를 넓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간혹 실패의 경험이 있을 때 '내 인생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건가? 내 인생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일까?'하고 실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야베츠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어!"라고 용기 있게 다시 일어설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이미 결정됐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토(領土)를 넓혀 달라고 청했다. 여기서 영토는 단지 땅(土)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평' 또는 '삶의 영역'을 뜻하는 것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
셋째, "주님의 손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영토(영역)를 넓히기 위해 너무 큰 일을 시도할 때도 있다. 때로는 실패도 한다. 야베츠는 자신의 영토가 넓어지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자 주님 도움이 필요함을 금방 알게 됐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한 손길'에 의지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구체적 삶의 질곡에서 하느님께 도움의 손길을 청할 줄 알았다.
넷째, "제가 환난을 벗어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다. 시험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굴복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야베츠는 "환난 속에서 나를 지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환난을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는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쳐 주신 것과 같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우리도 야베츠나 예수님과 똑같이 기도해야 한다. 유혹이나 환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유혹을 최대한 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구르의 기도는 잠언 30장, '아구르의 잠언' 내용 중 일부이다. 아구르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지혜도 없고 슬기도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지만 그야말로 진정 하느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그가 하느님께 간청한 첫째는 '허위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죽기 전의 소원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이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후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볼 때, 정말 헛된 것에 매여 산 날이 얼마나 많았나를 깨달은 자의 기도임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라는 기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넉넉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난하게 하지 마시고, 부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진정 무엇을 위해 부유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유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아구르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청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가 많아짐으로 인해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게 되기를 청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부유함보다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부족함이 낫다는 간구였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많은 것을 이루려 하고 많은 것을 누리려 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상기해야 한다. 하느님을 잃는 것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